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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의 지적실천"

달고양이 Friday 2014. 8. 24. 23:30

 

 

박정수의 현장 인문학리포트1- "미셸 푸코의 지적실천"

 

수유너머R 연구원 박정수님

 

현장 인문학 리포트

사실 저는 ‘인문학’(human science)이란 단어를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실용적이지 않아서도 아니고 명석한 진리를 말하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사회학, 심리학, 교육학은 유전공학만큼이나 인간의 삶에 실용적인 지식을 제공합니다. 또 범죄자의 범죄 동기가 설명 안 될 때 정신의학이 개입하는 것처럼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애매한 것들을 정해주는 진리 효과를 가집니다. 제가 ‘인문학’이란 단어를 꺼리는 이유는 ‘인간’에 관한 인문학적 진리 체계가 정상성과 비정상성을 구분하고 사람들을 통치권력에 예속시키는 기능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인문학을 공부하는 수유너머 연구원입니다’라고 소개하는 이유는 ‘인문학’이라는 단어의 익숙함 탓도 있지만 좀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미셀 푸코가 비판한 것처럼 19세기 초반에 출현한 근대 인문학은 지금도 통치 권력에 예속된 기능을 갖고 있지만 그에 저항하는 지식 역시 인간에 관한 앎의 형태를 띤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문학은 인간의 ‘본질’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탐사합니다. 그것은 어떠한 권력과 사유가 사람들을 인간 취급 못 받는 한계지점으로 내모는지를 연구하는 비판-인문학입니다. 또한 그 한계지점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지, 지금의 삶과는 다른 어떤 삶의 원형이 생성되는지 보는 해방의 인문학이기도 합니다.

수유너머R이 재소자, 장애인, 홈리스, 빈곤지역의 청소년들, 농성장의 사람들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과 함께 인문학을 공부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에게 ‘인문학’이 필요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인문학이 그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경계 바깥으로 내 몰린 자들의 삶이야말로 ‘인간’의 경계에 대한 ‘인문학’이 새로 태어나는 ‘현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장 인문학’이란 이미 있는 인문학을 가지고 불쌍한 사람들한테 찾아가는 출장 인문학이 아니라 인간의 경계에 대한 새로운 앎이 생겨나는 현장의 인문학입니다. 현장은 물리적인 장소라기보다는 지금까지의 근대인문학이 중지되고 인간의 경계에 대한 새로운 앎이 생겨나는 ‘사건’의 시공간입니다. 앞으로 ‘현장 인문학 리포트’라는 제목으로 제가 겪은 인문학적 사건을 보고하려 합니다.

 

첫 번째로 보고드릴 것은 현장 인문학의 ‘모델’로서 미셀 푸코의 지적 실천입니다. 푸코는 그 책도 중요하지만 지적 실천도 배울 게 참 많은 철학자입니다. 우선 70년 당시 가장 유명한 철학자 중 하나였던 푸코는 정치적 사안에 대해 동료들을 모아 성명서를 발표하고 항의를 조직하는 방식으로 개입했습니다. 민주화 시위에 교수들이 성명서를 내거나 대열 앞에 서는 게 별로 낯설지 않은 우리로서는 별게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푸코의 항의는 민족(국가)주의에 젖은 다수 대중의 감각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들입니다.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차별과 테러에 대한 항의, 재소자들의 인권 실태에 대한 항의, 스페인의 프랑코 정부가 반체제 인사에게 사형언도를 내린 것에 대한 항의 방문, 독일 적군파 재판의 변호사가 프랑스에 망명을 요청했을 때 거절한 정부에 대한 항의, 1981년 폴란드 정부의 자유노조 탄압을 모른 채 한 프랑스 좌파 연립정부에 대한 항의 등 주류 진보운동의 관점에서는 대단히 껄끄러운 사안에 적극 개입했습니다. 다수 대중의 감각보다 한 발 앞선 철학적 사유에 근거한 항의라고 할 수 있죠.

 

그 중에서 세 가지 참여(engagement)를 소개하겠습니다. 첫째는 1971년에 푸코가 주도해서 만든 ‘감옥정보그룹’(GIP) 활동입니다. 판검사, 변호사, 신문기자, 의사, 심리학자, 간수, 재소자, 출소자 등 감옥에 관련된 사람들을 통해 감옥이 무엇인지, 누가 거기에 가고, 어떻게 왜 가는지,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죄수들과 감시원들의 생활은 어떤 것인지, 감옥의 건물, 음식, 위생은 어떤지, 내부규칙과 의학적 통제와 작업장은 어떠한지를 면밀하게 조사하여 세상에 알리는 집단지성 활동입니다. 그 결과로 나온 책이 유명한 <감시와 처벌>입니다.

이 그룹이 만들어진 계기는 68혁명 때 투옥된 좌파 투사들 29명이 정치범으로서의 특별대우를 해달라며 단식투쟁한 사건이었습니다. 일반 범죄자들과 달리 취급해 달라는 그들의 요구는 대체로 수용되었는데, 푸코는 한발 더 나아가서 일반 범죄자들 전체의 감옥 내 인권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또한 재소자들의 인권문제에 그치지 않고 ‘감옥’이라는 제도 자체의 존재 이유를 계보학적으로 해부했습니다. 여기서 미묘한 문제가 제기됩니다. 좌파들은 감옥이라는 제도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혹은 좌파들은 부르주아 사법 시스템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아마 필요하다고 할 겁니다. 사회질서를 해친 일반 ‘범죄자’들과 정의로운 이념을 위해 싸우다 잡힌 자기네들은 다르다고 하겠죠? ‘뭐가 다른데?’ 라고 푸코는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무엇을 위해 싸우는 건가? 그저 국회와 행정부, 사법부를 장악하려고만 하는가? 감옥, 학교, 군대, 병원, 가족, 주류 진리체계 등 지배적인 사회질서 전체를 바꾸려는 게 아닌가?’

부르주아 사법 체계에 대한 좌파와의 입장 차이는 ‘민중적 사법’에 대한 논쟁에서 두드러집니다. 1970년 랑스에서 몇 명의 광부가 죽은 사건에 대해 경찰이 보여준 행동을 비난하고 해당 탄광회사를 공격하기 위해 마오이스트들은 ‘인민재판’이라는 민중적 사법을 제안했습니다. 부르주아들은 못 믿겠으니 민중이 독자적인 사법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에 대해 푸코는 계급적 입장보다 근대적 사법 체계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갈등 당사자 두 명 뒤에 진리를 판결하는 제 3의 심급을 둔 근대적 시스템 자체가 문제라는 겁니다. 이 제 3의 심급은 물론 판사이지만 ‘진리’를 말하는 지식인들(정신의학자, 사회학자, 교육학자 등)이기도 합니다.

이런 입장 차이가 불거진 사건이 있습니다. 72년 광산도시에서 16세의 한 소녀가 피살되었고, 예심판사는 그 도시의 저명한 부동산 거래 공증인 ‘르루아’를 구속했습니다. 검찰청이 보석을 요구했지만 진보적인 파스칼 판사는 거절했습니다. 이때 마오이스트들의 ‘진실-사법 위원회’를 만들어 대중을 선동하며 르루아의 인민재판을 요구했습니다. <인민의 대의>지는 ‘이제 그들은 우리 아이들을 죽이고 있다’라는 표제 하에 “그런 짓을 할 사람은 부르주아밖에 없다”고 썼습니다. 하지만 <인민의 대의> 사장이었던 사르트르는 계급의 증오에 휩쓸려 증거도 없이 한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가는 여론재판을 비난했습니다. 민중적 사법을 찬성했고, 그에 반대한 푸코를 비난했던 사르트르로서는 뜻밖의 입장이었습니다. 푸코는 어떤 입장이었을까요? 푸코는 사회면 사건 하나를 가지고 정치투쟁을 벌이고 있는 민중투쟁의 현장에 달려갔습니다. 민중적 사법에 대해 마오주의자들과 각을 세웠던 푸코는 의외로 군중의 인민재판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습니다.

 

“그 개입이 없었다면 르루아는 석방되었겠지요. 파스칼 판사는 상부의 압력에 굴복을 했을 겁니다. 항상 보호만 받고 있던 북부의 부르주아지가 이처럼 보호벽 밖에 내던져진 것은 난생 처음일 겁니다. 그 점이 중요합니다.”

 

앞서 민중적 사법에 관한 마오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푸코는 이런 말은 한 적이 있습니다.

 

“진정한 민중적 사법의 경우에는 세 요소가 아니라 민중과 적이라는 두 요소가 있을 뿐입니다.” 라고.

 

민중적 사법을 찬성했던 사르트르가 르루아에 대한 인민재판이 사법적 진리에 입각하지 않았다고 비난한 것과 묘한 대조를 이루지 않습니까? 진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닙니다. 푸코 역시 진실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이 사법적 복종의 근거가 되는 것은 역겨워했습니다. 진실은 용기와 결합되어야 하고 저항 세력의 자기-통치에 결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셋째 참여는 이란혁명에 대한 위험한 개입입니다. 78년 이란의 샤(왕)의 군대가 시위 군중에 발포하여 4천 명이 죽었습니다. 이란 혁명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죠. 푸코는 이탈리아의 일간지 <코리에레 델라 세라>의 제안으로 이란 혁명을 취재하러 달려갔습니다. 푸코는 이란에서 이란 혁명의 지도자들과 대중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호메이니’를 기다렸고 ‘이슬람’ 혁명을 열망했습니다. 혁명의 현장에서 이슬람 이념이 새롭게 생성되는 것을 목도하면서 푸코는 현장 인문학의 ‘테제’로 삼고 싶은 말을 했습니다.

“이념이 생겨나는 곳, 그것들이 폭발하는 현장을 목격해야만 한다. 그것을 말하는 책 속에서가 아니라 그것들의 힘이 표출되는 사건들 속에서, 그리고 그 이념들의 주변에서, 그것들에 찬성하며 또는 반대하며 펼쳐지는 투쟁들 속에서 그것을 직접 보아야 한다.”

이란 혁명의 리포르타쥬 속에서 푸코는 샤의 근대화에 맞선 이슬람 혁명이 지닌 역사성과 세계사적 의미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당연히 근대-진보주의자들은 푸코를 맹렬히 비난했습니다. 이슬람 종교의 위험성을 간과했다고. 그들의 우려대로 79년 망명 중이던 호메이니가 돌아오고 반-이슬람주의자에 대한 투옥과 처형, 무자비한 탄압이 이뤄졌습니다. 푸코는 이란에서 만났던 이슬람 지도자들에게 항의하는 공개편지를 썼고 호메이니에게 축출된 혁명 지도자들을 구해내기 위해 백방으로 애썼습니다. 프랑스 지성계는 섣불리 이슬람 혁명을 예찬했던 푸코를 맹비난 했습니다. 철학자라는 사람이 한치 앞도 못 보고 이슬람 혁명에 도취되어 버렸다고. 이에 푸코는 <르몽드>지 1면에 실린 ‘봉기는 무용한가’에서 자신의 입장을 밝혔습니다. 부연 설명 필요 없이 두고두고 곱씹을 만한 그 말을 인용하면서 첫 번째 현장 인문학 리포트를 마치겠습니다.

 

“요즘에 지식인이라는 말은 별로 좋은 인상을 주지 않는다. 나는 이 말을 아주 정확한 의미에서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내가 지식인이 아니다’라고 말할 계제가 아니다. 그렇게 한다면 사람들이 웃을 것이다. 나는 지식인이다. 사람들은 내가 나의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을 것이다. 예컨대 ‘전체의 커다란 필연성에 비해볼 때 그런 식의 죽음, 그런 식의 함성, 그런 식의 봉기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내게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상황 속에서의 일반원칙이 중요할 분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전략가라면, 그 전략가가 정치인이든 역사가든 혁명가든, 또는 샤나 아야톨라의 추종자든 나는 개의치 않는다. 나의 이론적인 도덕은 그와 정반대이다. 그것은 비-전략적이다. 개인이 저항하고 나섰을 때 그것을 존중하고, 권력이 보통 사람들을 옥죌 때에는 강경하게 항의한다. 간단한 선택이고 불안한 작업이다. 왜냐하면 역사의 밑에 역사를 단절시키고 뒤흔들어 놓는 어떤 것이 있지 않는가 엿보아야 하고 동시에 정치의 뒤에서 무조건적으로 정치를 제한하는 어떤 것이 있지 않는지를 감시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것은 나의 일이다. 나는 그런 일을 하는 첫번째 사람도 아니고 유일한 사람도 아니다. 나는 다만 그것을 선택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