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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의 홉스 해석

달고양이 Friday 2015. 1. 18. 22:18

 

임미원, "홉스의 법 및 정치사상에 대한 재해석 가능성-슈미트, 아감벤, 푸코, 아렌트의 홉스 해석을 중심으로", 법과사회 42호(2012년 6월) Korean Law & Society Association, Vol. 42, 2012. 6. pp. 289-318.(300-306)

 

한편 푸코는 자신의 저서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 권력과 전쟁의 관계에 대해 독특한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어떻게, 그리고 언제부터 사람들은 전쟁이 권력관계 안에서 기능하고, 중단없는 전투가 평화에 기여하고, 민간질서는 근본적으로 전쟁의 질서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는가”라는 물음이다. 푸코의 분석에 따르면 근대의 문턱에 이르렀을 때 전쟁의 , 수행과 제도들은 중앙집권적 권력으로 집중되고 점차 국가권력만이 전쟁을 수행하게 되는 ‘전쟁의 국영화’가 나타나게 된다. 내전이나 종교전쟁이 아닌 국가 간의 전쟁, 국경선을 두고 벌어지는 집중화된 전쟁의 시대가 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영구적 사회관계로서의 전쟁, 또는 모든 관계와 모든 권력제도들의 토대로서의 전쟁’에 관한 담론 또한 탄생하게 된다. 시대적으로는 16세기 내란 및 종교전쟁이 끝날 무렵 등장한 이 담론의 메시지는 ‘정치권력이란 전쟁이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권력과 법제도들은 전쟁의 제거(종결)에서 자기근거를 마련하는 것이 아니며, 법과 국가가 전쟁의 완충지대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최대한의 긴장지점이면서 적나라한 힘의 관계로서 전쟁은 법제도와 질서의 동인이며 모든 잠재적 평화 상태 이면의 숨은 질서와 같다. “전쟁은 바로 평화의 암호”인 것이다.
푸코는 특히 16, 17세기 초 어떻게 전쟁이 권력관계의 분석틀로 나타났는지 추적해 보여주려 했고 거기에 홉스가 등장한다. 푸코에 따르면 홉스는 질서, 평화, 법률의 이면에, 그리고 리바이어던이 탄생하는 순간에도 여전히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이 존재하며 국가형성의 기초가 되는 전쟁은 그 최초에 평등(동등)함에서 생겨나 평등의 요소 안에서 진행되는 전쟁이라고 보았다. 차이가 평화를 만들고 평등이 전쟁을 만든다고 단언한 홉스의 논리는 자연적인 힘의 평등성(동등성)이 서로 전쟁을 넘보는 대결의지를 낳고 잠재적인 불안정성과 위험상태로 이어지며, 힘의 차이가 오히려 강자에 대한 공포, 서로 간의 전쟁능력과 의지를 둘러싼 표상(상상)적 계산과 의지 표출, 위협 전술을 통해 전쟁의 회피로 귀결된다는 것이었다.
홉스에 대한 푸코의 분석은 두 방향으로 전개된다. 한편으로는 ‘전쟁상태의 종결 또는 자연상태의 해소로서의 법과 주권’이라는 논리를 비판하며, 다른 한편으로 ‘모든 사회 내에는 집단에 대한 집단의 전쟁 형태로 일반화된 전쟁이 존재함’을 보여주려 한다. 이 일반화된 전쟁은 홉스 식의 전쟁, 즉 보호와 복종의 이름으로
주권적 권력을 정당화하는 출발점으로서의 추상적(가상적) 전쟁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실행되는 자율적이고 미세한 권력의 기술들에 맞서 벌어지는 다양하고 지속적인 투쟁상태를 의미한다. 푸코는 이것을 ‘사회에서 벌어지는 진짜 힘의 관계를 가진 진짜 전쟁’이라고 표현한다.
우선 홉스의 논리에 대한 푸코의 분석에 따르면, 동등한 인간들 간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최초의 전쟁상태는 실질적-물리적 전쟁이 아니라 잠정적인 공포 하에 표상과 현시의 체계를 갖춘 의지들이 작동하는 상태이고, 국가 탄생 이후에도 포기되지 않은 채 주권적 권력의 토대로 작용한다. “홉스에게 있어서 최초의 전쟁은 없었다”는 것이다.

“홉스가 말하는 최초의 전쟁상태 안에서 서로 만나 대결하고 교차하는 것은, 무기도 아니고 주먹도 아니며, 광포하게 마구 날뛰는 야생의 힘들도 아니다. 홉스의 최초의 전쟁 안에는 전투가 없고, 유혈도 시체도 없다. 거기에는 표상들, 현시들, 기호들, 그리고 과장적․계략적․허위적인 표현들이 있을 뿐이다. … 이것은 표상들이 교환되는 무대이고, 그 비확정성이 어디까지나 잠정적일 뿐인 두려움의 관계이다. 요컨대 이것은 실질적인 전쟁이 아니다. … 전쟁상태의 성격은 자연스러운 평등상태인 경쟁상태를 끊임없이 조정하는 일종의 외교이다.”

결국 죽음보다 삶을 선호하는 의지가 공포와 계산을 낳고 주권을 형성한다는 의미에서 의지 ․ 공포 ․ 주권의 논리로 전개되는 홉스의 담론은 전쟁에 대한 부정의 담론으로 볼 수 있다. 홉스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현실적 투쟁이 사회를 움직이는 요인이라고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 잠재적 투쟁 가능성을 둘러싼 개인들의 공포와 계산이 전쟁을 막는 국가주권을 낳게 된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즉, 자연상태는 실제적인 전쟁이 아니라 각자 타인의 전투의지를 가늠하고 자신의 위험을 계량하기 위한 상상작용일 뿐이며, 주권은 호전성과 물리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쟁을 회피하게 해주는 계산에 의해서 수립된다. 역설적이게도 홉스에게서 국가의 기초를 세우고 거기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은 非전쟁이다.

더 나아가 푸코는, 전쟁의 담론이 아닌 ‘계약과 주권’의 담론을 견지함으로써 홉스가 제거하려 한 것은 권력에 맞서는 사실적 ‘투쟁과 저항’의 담론이었다고 본다 홉스의 담론이 가로막고자한 것은 폭력 자체라기보다는 투쟁과 저항의 불가피성에 관한 정치적-역사적 의식이었다는 것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사회를 움직이는 요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홉스는 이 전쟁상태를 국가권력 형성 이전의 자연상태로 제한하여 가두어두고, 국가주권 아래에서는 복종만이 있으며 내전도 저항도 있을 수 없음을 강조했다. 적어도 그런 점에서 홉스는 국가주의자이고 보수주의자였다. 슈미트가 표현했듯이, 홉스가 진실로 무엇을 생각하였는가를 이해하는 데에 주요한 물음은 ‘정치적 반란자나 폭도가 만일 주권자에게 전쟁을 선언한다면, 즉 주권자와 자기의 적대자들을 공공연하게 적으로 선언하고 자연상태로의 복귀라는 비약을 감행한다면, 그때 그 자는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것이며, 그 때 인간들이 공통으로 잃는 것은 무엇인가가 홉스의 관심문제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푸코의 관점에서 갈등과 전쟁은 홉스가 이야기했던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전제로서의 자연상태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집단 대집단의 전쟁으로서 모든 사회체를 관통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사회적 진실을 담은 “담론은 전쟁에서부터 시작되고 전쟁에 대해 말”하게 된다. 푸코의 리바이어던 분석은 결국 ‘홉스가 부인했고 푸코가 되살리고자 한 사회의 판독원리로서의 전쟁’(역사-정치적 담론)이라는 한 축과 ‘한없이 두텁고 많은 지배관계를 덮고 있는 자율적이고 미세한 권력의 기술들에 대해 이해(이야기)하기 위해 리바이어던이라는 사법적 주권 모델(철학-법률적 담론)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또 다른 축으로 구성된다.

푸코가 비판적으로 분석한 사법적 주권모델은 개인을 자연권과 원시적 권리의 주체로 놓고 국가의 이상적 기원을 묻는다. 이상적인 신민들이 그들 자신과 자신의 권력에서 어떤 부분을 양보(하기로 합의)했는지, 다수의 개인과 의지들에서부터 어떻게 주권이라는 정신에 의해 고무된 하나의 의지, 하나의 육체가 형성될 수 있는지를 묻는 이 모델은 본질적으로 신하에서 신하로 이어지는 순환이론이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법과 주권의 순환, 보호와 복종의 메커니즘을 동반한 군주의 탄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쟁과 예속의 메커니즘에 의한 ‘신하들의 제조’에 있다. 홉스가 리바이어던의 정신이라고 말했던 주권보다는 “차라리 그 수많은 주변적 육체들 , 즉 권력의 효과에 의해 신하로 형성된 그 육체들”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야 하고, 리바이어던과 자연상태의 담론 아닌 진짜 전쟁의 담론이어야 하는 것이다. 국가는 전쟁의 종결로부터 형성된 것이 아니며, 본질적으로 “국가의 탄생을 도모한 것은 전쟁”이었다.

이렇게 푸코는 홉스의 리바이어던과 자연상태 담론(주권 모델)의 권력성, 그리고 전쟁(담론)의 근본성을 동시에 강조한다. 홉스에게서는 전쟁(담론)이 끝나는 곳에서 리바이어던(국가주권)이 시작된다면, 푸코에게서는 리바이어던(국가주권)의 모델이 끝나는 곳에서 역사적-정치적 전쟁담론이 시작된다. 이때, 리바이어던의 주권을 대체하는 것이 ‘통치’ 관념이다. 통치란 ‘사람들을 적절한 목적으로 이끌기 위해 사물을 올바르게 배치하는 일’을 뜻하며, 16, 17세기의 내치(內治)를 기반으로 하여 18세기에 ‘인구’, ‘정치경제학’과 ‘안전장치’의 요소를 중심으로 정비된 권력체제 또는 미시권력에 내재하는 합리성이라는 의미에서 근대국가의 형성을 하부에서 지탱하는 통치기술과 관계된다. 통치는 그 이전 시대의 ‘주권’과는 본질적 차이가 있다. 주권은 무엇보다 공동선으로서 공국(영토와 신민)의 보전을 목표로 하며 법(주권자)에 대한 복종을 도구로 삼는다. 주권행사-법복종으로 이어지는 순환적인 힘의 작용이 주권의 내용이자 목적이라는 점에서 주권의 목표는 ‘주권 내부’에 있는 것이 된다. 이에 비해 통치의 목적은 자신이 관리하는 ‘사물 내부’에 존재하고 법과는 다른 다양한 전술들을 도구로 삼는다. 주권에 대한 복종-법에 의한 통제가 아니라 사물에 대한 관리의 최적화가 통치의 문제이고 그 관리되어야 할 사물의 중심에 인구가 있다. 중세의 봉건적 영토성에 기초한 ‘사법국가’에 이어 국경이라는 영토성을 기반으로 통제하고 규율하는 15, 16세기의 ‘행정국가’를 거쳐, 영토성보다는 인구대중을 대상으로 하여 자체의 이성을 찾아 통치하는 ‘통치국가’로 옮겨가게 되면서 비로소 ‘국가’라는 어떤 것이 명확히 숙고되고 계산된 전략 속에 들어가기 시작했다고 푸코는 분석한다.
또한 국가 내부의 통치성(내치)의 확립과 더불어, 중세의 단일-보편-완결적인
세계질서가 소멸한 이후 필연적으로 공존할 수밖에 없게 된 다수의 국가들이 통치에 필요한 합리성을 걸고 경쟁하게 되면서 평화와 전쟁 역시 이전과는 다른 의미와 방식을 취하게 된다 단일보편의 . 제국권력에 의한 통일이 아니라 상대적으로만 보편적인 다수 국가의 공존의 질서가 추구된다는 점에서 평화란 “균형잡힌 다수성 내에서 얻어지는 안정성”을 의미했고, 그런 다수의 잠정적인 균형과 평화의 결정적 도구 중 하나가 전쟁이었다. 중세의 전쟁은 본질적으로 부정, 법의 위반에 대한 제재로서 正戰의 성격이 강했고 그런 점에서 전쟁의 세계는 司法의 세계와 동질적이었다. 이와는 달리 근대 국가 간의 전쟁에서는 국가들의 평형을 추구하는 정치와의 연속성이 두드러진다. 불의에 대한 제재, 사법적 권리의 회복이 아니라 국가들의 정치적인 평형이 문제였기에 평화는 ‘통일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다수의 ‘잠정적 균형상태’로서만 가능했다.

이렇게 중세적 논리를 극복한 근대의 전쟁관념은 18세기에 통치의 합리화가 가속화되면서 또다른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전쟁은 국가외부적-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사회의 생존조건으로서, 사회 그 자체 속에서 생겨나는 위험들에 대항해 사회를 지키기 위한 수호 장치라는 의미를 띠게 된 것이다. 이제 내적 전쟁, 사회적 전쟁이라는 관념을 통해 전쟁은 외적-정치적 역사에서 사회 및 생명 내부로(생물학으로), 법률적인 것에서 의료적인 것으로 옮겨간다. 푸코의 분석에 따르면, 이 과정을 뒷받침한 것이 그 이전의 (16세기적 통치인) 내치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새로운 통치이성이었다. 이는 정치적 합리성 아닌 경제적 합리성, 권리의 주체와는 다른 이익의 주체로서의 경제인, 인위적 통제와 규율보다는 자연적 조절 및 자유-안전의 테크놀로지에 기반한 자유주의 통치성으로서, 근본적으로 국가와는 다른 ‘시민사회’의 형성과 더불어 그 속에서 무제한적으로 자기확대되는 통치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권력은 리바이어던적-정치적 주권이 아니라 자유방임적-경제적 통치 권력이며, 전쟁 자체를 제거하는 권력이 아니라 사회(내부)화된 전쟁을 통해 사회 스스로가 방위되게 하는 권력이다.

푸코의 분석에 따르면 근대국가의 통치이성으로부터 탄생한 시민사회가 유연하 면서 무제한적인 자유주의적 통치성을 키워가게 되고 최종적으로 경제주의적 통치성이 극점에 이르러 시민사회가 국가권력을 흡수하게 될 때, 통치성과 정치가 결정적으로 결별하면서 정치의 시간, 국가의 시간은 끝나게 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자유주의 통치성의 역설, 즉 너무 많은 통치가 아닌지 끊임없이 문제제기했던 사회가 다시 자유와 안전을 위해 권력을 요청(행사)하게 되는 역설이 시작되며, 거기서부터 ‘통치성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정치화가 가능하다고 푸코는 진단한다. 반면 바로 그 통치성의 극점에서 이 자유주의 통치성이 야기한 국가의 소멸, 정치적인 것의 소멸을 애도하고 그 이전 ‘국가이성에 의한 통치’시대로의 회귀를 구상한 것이 슈미트였다. 이미 주권의 시대가 아니라 통치의 시대, 특히 자유주의-경제주의적 통치의 시대임을 마치 ‘통치의 교리문답서’를 연상시키는 미세한 분석으로 보여준 푸코 못지 않게 슈미트 역시 국가-정치의 시대, 유럽공법의 시대가 지나고 자유주의-경제주의-규범적 보편주의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애도 속에서 정확히 인식하였다. 그런 점에서 슈미트는 시대에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16, 17세기적 국가이성에 의한 통치로의 회귀는 불가능함을 알면서도(알았기에) 부르주아 시민사회의 자유주의-다원주의적 중립성-경제주의에 맞서 국가사회주의적 정치투쟁으로 대결하려 한 것은 슈미트의 시대착오적 오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