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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탈리즘 본문

푸코디언 연구

오리엔탈리즘

달고양이 Friday 2015. 3. 8. 13:57

 

 

에드워드 사이드 지음, 박홍규 옮김

오리엔탈리즘

 

 

그들은 스스로 자신을 대변할 수 없고, 다른 누군가에 의해 대변되어야 한다.

칼 마르크스 <루이 보나파라트의 브뤼메르 18일>

 

마르크스의 동양관이 당대의 오리엔탈리즘에 근거한, 지극히 보수적인 것이었음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을 신주처럼 모시는 러시아(구소련), 중국, 북한의 학문은 말할 것도 없고 자본주의권의 사회주의자들도 마찬가지의 가설에 입각하고 있다. 예컨대 북한의 학문이란 전통사회를 철저히 매도하는 것이며, 그것을 추종하는 남한의 진보파도 그와 동일하다. 마르크스의 이론이 서양우월주의-동양열등주의에 근거한 것이라면, 사회주의가 그러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라면, 적어도 그것이 중국과 북한에서 그리고 기타 동양권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재검토되어야 마땅하다. 적어도 그것이 경제물신주의에 젖은 것이고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경제성장주의에 광분하는 것인 한 근대 서구가 낞은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마르크스란 기본적으로 서구의 산물임을 비판적으로 그것이 오리엔탈리즘의 해명을 통하여 동양에 관한 서구의 인식과 지배를 극복하고자 하는 이 책의 기본 취지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 마르크스주의의 서구중심사상은 그것대로 우리 시대에서 해결해야 할 하나의 근본적인 문제임에 틀림없다. 그의 반동양주의에 대한 비판은 본문에서 다시 언급된다.

 

동양이라고 하는 것은 평생을 바쳐야 하는 사업이다.

벤저민 디즈레일리 <탕크레드>

 

마르크스가 이론가였다면 디즈레일리는 소위 대영제국의 수상으로서 동양의 식민화에 대한 포부를 밝히고 있다. 저자는 마르크스로 대표되는 학문과 디즈레일리로 대표되는 정치를 통하여 지식과 권력, 앎과 힘의 관련을 보여 준다. 이 두 가지의 인용이 이 책에서 비판되는 오리엔탈리즘의 두 가지 속성, 즉 인식과 실천을 대변한다.

 

 

오리엔탈리즘이란 서양이 동양에 관계하는 방식으로서, 유럽 서양인의 경험 속에 동양이 차지하는 특별한 지위에 근거하는 것이다. 유럽 서양인의 경험 속에 동양이 차지하는 특별한 지위에 근거하는 것이다. 동양은 유럽에 단지 인접되어 있다는 점만이 아니라, 유럽의 식민지 중에서도 가장 광대하고 풍요하며 오래된 식민지였던 토지였고, 유럽의 문명과 언어의 원천이었으며, 유럽문화의 호적수였고, 또 유럽인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반복되어 나타난 타자 이미지이기도 했다. 나아가 동양은 유럽이 스스로를 동양과 대조되는 이미지, 관념, 성격, 경험을 갖는 것으로 정의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동양이란 그 어느 것도 단순히 상상에 그친 것은 아니었다. 그 동양은 유럽의 실질적인 문명과 문화의 필수적 구성 부분이었다. 오리엔탈리즘은 그 필수적 구성 부분을 문화적으로, 심지어 이데올로기적으로도 하나의 담론 형태로 표현되고 대변한다. 그러한 담론은 제도, 어휘, 학문, 이미지, 주의주장 심지어 식민지 관료제도와 식민지적 스타일로 구성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미국의 동양 이해란 유럽의 그것보다는 훨씬 단순하게 보일 수 있다. 비록 일본이나 한반도, 인도차이나에서 미국인들이 감행한 최근의 모험으로 인하여, 어느 정도는 냉정하고 현실적인 '동양'인식이 생겼다고 할 수 있어도 말이다. 나아가 근동(중동)에서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 역할이 엄청나게 확대된 결과, 미국인들 사이에 동양을 더욱 잘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 높아지고 있다. <오리엔탈이즘> p.15.

 

 

 

내가 오리엔탈이즘이라고 하는 말에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하고, 그 모두가 서로 의존관계에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 앞으로 독자들에게 분명하게 인식될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의 여러 가지 의미 가운데 가장 널리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것은 학문과 관련된 분야이다. ‥‥‥  이러한 학문적 전통-그것의 축적, 이식, 전문화 그리고 전달이 이 책 주제의 일부를 형성한다-과 관련되어 오리엔탈리즘에는 더욱 넓은 의미가 있다. 곧 오리엔탈리즘은 '동양'과 (대체로) '서양'이라고 하는 것 시이에서 만들어지는 존재론적이자 인식론적인 구별에 근거한 하나의 사고방식이다. 따라서 시인, 소설가, 철학자, 정치학자, 경제학자, 식민지 제국의 관료를 포함한 수많은 저술가들이 동양과 그 주민, 풍습, '정신', 운명 등등에 관한 정교한 이론, 서사시, 소설, 사회적 설명, 정치적 기사를 쓰는 경우 그 출발점으로 동양과 서양을 나누는 기본적인 구분을 수용하여 왔다. 그리고 '이러한' 종류의 오리엔탈리즘을, 예컨대 아이스킬로스를 비롯하여 빅토르 위고, 단테, 칼 마르크스까지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 정도로 넓은 의미를 갖는 '범위'속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방법론상의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이 서설의 뒷부분에서 논의하고자 한다.

<오리엔탈리즘> p.16-17.

 

 

오리엔탈리즘의 학문적 의미와, 그것이 갖는 다소간의 상상적 의미 사이에는 계속적인 교류가 있었다. 18세기 말 이후 이 두가지 사이에는 상당한 양의, 엄격히 규율된 - 심지어 통제된- 교류가 있었다. 여기서 나는 오리엔탈리즘이 갖는 제3의 의미에 도달하게 된다. 이는 앞에서 본 두 가지보다도, 역사적, 실질적으로 더욱 명확하게 한정되는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을 논의하고 분석할 때 대충 그 출발점을 18세기 말로 잡는다면,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을 다루기 위한 - 동양에 관하여 서술하거나, 동양에 관한 견해에 권위를 부여하거나, 동양을 묘사하거나, 가르치거나 또는 그곳에 식민지를 세우거나 통치하기 위한 - 동업조합적인 제도로 볼 수 있다. 요컨대 오리엔탈리즘이란,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억압하기 위한 서양의 방식이다. 여기서 나는 미셀 푸코가 <지식의 고고학>과 <감시와 처벌>에서 설명한 담론이라는 개념을 원용하는 것이 오리엔탈리즘의 본질을 밝히는 데에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곧 오리엔탈지즘을 하나의 담론으로 검토하지 않은 채, 계몽주의 시대 이후의 유럽문화가 동양을 정치적, 사회적, 군사적, 이데올로기적, 과학적, 상상적으로 관리하거나 심지어 동양을 생산하기도 한 거대한 조직적 규율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없다고 나는 주장한다. …… 도리어 오리엔탈리즘이란, '동양'이라고 하는 독특한 존재가 문제되는 경우, 언제나 불가피하게 거기에 조준이 맞추어진 - 따라서 언제나 그것에 포함되는 - 관심의 총체망이다. 그것이 어떻게 하여 생겼는가를 이 책에서 분명히 밝히고자 한다. 또한 이 책은, 유럽문화가 일종의 대리물이자 은폐된 자신이기도 한 동양으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킴으로써 자신의 힘과 정체성을 얻었다는 점도 분명히 밝히고자 노력한다. <오리엔탈리즘>, p.1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