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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통치

식민지 특수은행의 兼業銀行化와 은행사적 의미

달고양이 Friday 2015. 4. 23. 01:16

정병욱, "식민지 특수은행의 겸업과 보통은행의 정체", 역사문제연구 5호, 인용

2. 식민지 특수은행의 兼業銀行化와 은행사적 의미

 

1) 일본 특수은행의 분업과 식민지 특수은행의 겸업

 

일제시기 은행은 법적 근거에 따라 두 계통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하나는 銀行條例(1906. 3. 勅令 第12) 銀行令(1912. 10. 制令 第5)의 규정을 받는 普通銀行이며, 다른 하나는 特別法에 의해 설립되고 규정받는 特殊銀行이다. 漢城銀行(1897), 大韓天一銀行(1899)朝鮮商業銀行(1911), 韓一銀行(1906) 같은 은행이 보통은행에 속하며, 한국은행조선은행이나 농공은행조선식산은행은 각각 韓國銀行條例(1909. 7. 法律 第22)․「朝鮮銀行法(1911. 3. 法律 第48)農工銀行條例(1906. 3. 勅令 第13)․「朝鮮殖産銀行令(1918. 6. 制令 第7)에 의해 설립된 특수은행이었다.

 

특별법에 의해 특수은행을 세워 일정한 부문의 자금조달 및 운용을 담당케 하는 것은 일본 금융제도의 한 특색이다. 일본에서는 주로 상업자금을 융통하는 보통은행이 성장하는 가운데 산업발달에 따라 보통은행이 맡기 어려운 무역농업공업 같은 부문에 자금을 원활히 조달하기 위해 1900년을 전후로 여러 특수은행이 설립되었다. 무역금융기관인 橫濱正金銀行(1880), 중앙은행인 日本銀行(1882), 농업 및 부동산금융기관인 日本勸業銀行(1897)農工銀行(1897)北海道拓殖銀行(1900), 공업 및 동산담보금융기관인 日本興業銀行(1902) 등이 그것이다.

 

일본의 특수은행 설립은 후발국으로서 자본주의를 조속히 이식발달시켜야 하나, 이를 수행하기에는 민간자본이 취약하다는 현실여건에서 나온 조치였다. 국가의 보호와 감독 아래 특수은행을 세워 민간자본이 담당하기 어려운 부문을 금융적으로 지원하여 전체적으로 일본자본주의의 발전을 꾀했던 것이다.

 

특수은행 설립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던 것은 마쓰가타(松方正義)銀行分業論이었다. 大藏大臣을 역임했으며 일본 재정금융제도의 창시자로 불리는 마쓰가타는 영국프랑스독일의 은행제도를 참조하여 일본 나름의 은행분업론을 제창하고 그에 입각하여 특수은행을 세워나갔다.은행분업론에 따르면 크게 단기상업금융기관, 장기산업금융기관, 대중적 저축기관으로 은행체계를 3하고, 다시 장기산업금융기관은 농업 및 부동산금융기관과 공업 및 동산(유가증권)금융기관으로 나누었다. 이에 따라 日本銀行은 단기상업금융기관인 보통은행의 중앙기관으로 자리잡아갔고, 장기산업금융기관으로는 위에 열거된 특수은행이 설립되었다. 또한 貯蓄銀行條例(1890. 8. 法律 第73, 1893. 7. 시행)의 실시로 대중적 저축기관인 저축은행의 법적 토대가 정비되었다. 이로써 1900년대 초 일본 내 은행분업체계는 일단락되었다.

 

한편 일본은 淸日露日戰爭으로 확장된 식민지를 지배경영하기 위해 대만에 臺灣銀行(1899), 조선에 農工銀行, 韓國銀行朝鮮銀行 같은 특수은행을 세웠다. 식민지의 특수은행은 특별법에 의해 설립되었다는 점에서는 일본 내의 특수은행과 동일하지만, 그 업무 내용은 은행분업론에 입각한 것이 아니었다. 대만은행은 화폐발행권을 갖는 중앙은행이면서 상공업 및 공공사업에 자금을 융통하여 대만의 富源을 개발한다는 종합적인 목적하에 보통은행 및 산업금융기관의 업무도 담당했으며, 나아가 일본과 南中國 南洋을 연결하는 국제금융업무도 취급했다. 조선은행도 화폐발행권을 갖는 중앙은행이면서 보통은행 업무를 취급했다.

 

구체적으로 조선내 최초의 특수은행인 농공은행조선식산은행과 일본내 특수은행 중 비슷한 역할을 했던 일본권업은행농공은행북해도척식은행을 비교해보자. 일본내 일본권업은행농공은행이나 조선의 농공은행은 農工業改良發達을 위한 금융기관으로 출발했으며 북해도척식은행은 농공은행에 준하는 북해도지역의 은행으로 北海道拓殖事業을 위해 설립되었다.

이 은행들에게는 위와 같은 특수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보통은행과 달리 채권발행을 통해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1>을 보면 모두 설립 당시 납입자본금의 5배에서 10배에 이르는 채권을 발행했으며, 1931년경이면 납입자본금의 15배에 달하는 채권발행의 특권을 가졌다. 이렇게 조달된 자금을 바탕으로 5년에서 50년에 이르는 年賦貸付定期貸付 같은 장기대부를 할 수 있었다.

 

일본내 특수은행의 예금업무에는 제한이 가해졌다. 일본권업은행은 설립 당시 예금업무를 취급할 수 없었으며, 농공은행(일본)은 정기예금만 취급할 수 있었다. 둘 다 1910년에 예금업무가 인정되었으며 이후 확대되나 1945년 이전까지는 항상 제한이 뒤따랐다. 즉 일본권업은행은 모든 예금액이, 농공은행(일본)은 정기예금 이외의 예금액이 납입자본금 또는 납입자본금과 적립금의 합계를 넘어설 수 없었다. 자기자본 이상의 예금흡수를 금지한 것이다. 특수은행은 채권발행이라는 자금조달상의 특권을 가졌으므로 예금업무를 제한하여 보통은행의 주요 資金源을 보호하려는 조치였다. 비교적 은행분업론에 충실한 정책이라 할 수 있다.

 

<1> 일본내 특수은행과 농공은행조선식산은행의 주요 업무 비교

 

日本勸業銀行

農工銀行(일본)

북해도척식은행

농공은행·조선식산은행

자금 조달

채권

발행

납입자본금의 10

*192015

납입자본금의 5

* 192010

* 193115

납입자본금의 5

* 192010

* 193115

납입자본금의 5

* 191810

* 192415

예금

예금 不認定

*1910년 납입자본금 이내

*1941년 납입자본금+적립금 이내

*1945년 제한 철폐

정기예금 인정

* 1910년 기타 예금 인정

납입자본금 이내

* 1941

납입자본금+적립금 이내

예금(당좌특별당좌정기예금 등) 인정

예금(당좌특별당좌정기예금 등) 인정

자금 운용

장기

금융

年賦 50, 定期 5년이내

연부 30, 정기 5년 이내

*1920년 연부 50년이내

연부 30, 정기 5년 이내

* 1920년 연부 50년 이내

연부, 정기대부

*1914년 연부 20,

정기 5년 이내

*1818년 연부 30년 이내

*1924년 연부 50년 이내

단기

금융

단기금융 불인정

*1910년 제한적 인정

*1945년 제한 철폐

단기금융 불인정

* 1910년 제한적 인정

단기금융 인정. 액수 제한

* 1939년 제한 철폐

단기금융 인정

 

 

이러한 측면은 단기금융에 대한 제한에서도 잘 드러난다. 주로 예금에 의해 조달된 자금으로 운용되는 단기금융은 보통은행이 주업무로 삼고 있는 영역이다. 일본권업은행 및 농공은행(일본)은 예금업무가 인정 또는 확대되는 1910년에 가서야 비로소 단기금융을 취급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업무는 國債證券 또는 大藏大臣이 인정하는 유가증권 매입, 산업조합과 같은 특수법인에 대한 어음할인당좌대월, 생산물담보의 어음할인단기대부, 10人連帶 단기대부 등에 한정되었다.

 

반면에 북해도척식은행이나 조선의 농공은행은 설립 당시부터 자금조달이나 자금운용에서 보통은행 업무가 인정되었다. 두 은행 모두 제한 없이 예금을 취급할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해 조달된 자금을 단기금융에 운용할 수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北海道拓殖銀行法에는 보통은행 업무 세목이 구체적으로 명시된 반면, 農工銀行條例朝鮮殖産銀行令에는 총괄적으로 보통은행 업무를 인정했다는 점이다. 또한 북해도척식은행은 1939년 완전 보통은행화하기 전까지 단기금융에 운용되는 금액은 장기대부 총액을 넘지 못한다는 제한이 뒤따랐으나 농공은행이나 조선식산은행은 그러한 규정이 없었다. 북해도척식은행에 비해 조선의 농공은행 및 조선식산은행이 좀더 자유롭게 보통은행 업무를 겸업했던 것이다.

 

같은 특수은행이라 해도 설립된 곳이 일본이냐 식민지(대만, 조선) 또는 식민지에 준하는 원격지(북해도)냐에 따라 각기 다른 논리가 적용되었다. 일본내 특수은행은 은행분업론에 충실하여 업무간 분업에 중점을 두었다면, 원격지 및 식민지의 특수은행은 업무간 분업보다 지역적 분업의 측면이 강했다. 확보된 식민지지역을 영업구역으로 하여 각종 금융업무를 담당하는 특수은행이 설치된 것이다. 업무상으로는 分業銀行이 아니라 겸업은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