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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폴라니, 『거대한 전환』 본문

경제적 사유

칼 폴라니, 『거대한 전환』

달고양이 Friday 2022. 9. 11. 13:45

칼 폴라니, 거대한 전환

19세기 문명을 지탱했던 것은 세력균형 체제, 국제 금본위제, 자기조정 시장, 자유주의적 국가라는 4개의 기둥이였다. 이 기둥들은 정치제도와 경제제도로 구분될 수 있으며, 또는 국내 제도와 국제 제도로 구분될 수 있다. 칼 폴라니는 이 4개의 기둥에 의해 19세기 문명의 대략적 특징이 결정되었으며, 그 중에 금본위제가 가장 결정적이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19세기 근대문명의 몰락 원인은 금본위제라는 제도의 몰락이었다는 것이다.

 

폴라니는 궁극적으로 자기조정 시장은 완전한 유토피아였기 때문에 금본위제의 몰락 등 하부구조의 붕괴가 다시 상부구조가 붕괴로 이어졌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런 제도는 아주 잠시라도 존재할 수가 없으며, 만에 하나 실현될 경우 사회를 이루는 인간과 자연이라는 내용물을 아예 씨를 말려버리게 되어 있다. 인간은 그야말로 신체적으로 파괴당할 것이며 삶의 환경은 황무지가 될 것이다. 따라서 사회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떤 보호 조치이든 취하는 족족 시장의 자기조정 기능을 망가뜨리고 산업의 일상적 작동을 혼란에 빠트렸기에 사회는 또 다른 방향에서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고 말았다. 바로 이러한 딜레마 때문에 시장 체제의 발전 과정은 미리 정해진 길을 따라가게 되었고, 결국에는 자신을 기초로 삼는 사회 조직마저 무너뜨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거대한 전환, 94) 폴라니의 이러한 주장은 자기조정 기능 특히 자유시장주의자들이 내세우는 트리클 다운 효과의 역사적 근거가 없음을 전해주고 있다.

 

신성동맹과 유럽협조체제를 거치면서 유럽은 단기간의 국지전 등의 전쟁은 있었지만, 대규모의 전쟁을 회피하는데 일정정도 기여했다. 폴라니가 말하는 19세기 문명의 전대미문의 강고한 단결을 통한 백년 평화’(1815-1914)는 세력균형이 작동했기 때문에 달성되었다. 그러나 폴라니는 이러한 평화는 세력균형에 참여하는 권력들의 생존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신성동맹은 세습 왕조의 군주들과 봉건 권력자들의 담합체였고, 이들의 군대는 전 유럽에 걸쳐 소수자들을 짓밟고 다수자들을 억눌렸다. 신성동맹은 권력자들의 생존을 위해 전 유럽의 귀족 연대를 형성했고, 로마 교회는 남유럽과 중유럽에서 전 신분에 걸친 자발적 공무조직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신성동맹은 혈통과 신의 은총 등 중세적 가치를 통해 구축한 사회적 위계질서로 작은 마을까지 지배하였다.

 

그러나 이에 비해 유럽협조체제는 느슨한 국가 연합에 불과했다. 신성동맹이 군대의 힘을 통해 유럽의 실용주의적 평화를 달성한 것과 달리 유럽협조체제는 오트 피낭스(haute finance)를 통해 유럽의 평화를 유지했다. 오트 피낭스는 경제활동에서 자금을 중개하거나 금융업무를 넘어 경제 시스템을 창출하거나 변동하는 것에서 큰 수익을 얻는 높은 수준의 대형 금융 자본의 활동을 지칭한다. 가령 전쟁 자금의 대부 혹은 초대형 인수 합병 등이 이러한 활동에 해당된다. 폴라니는 오트 피낭스를 각국의 사회와 경제에 스며들어 전쟁 갈등을 조정하는 독자적인 힘으로 포착하였다. 유럽협조체제가 상시적으로 운영되지 못한 반면에 오트 피낭스는 최고의 탄력성을 가진 채 상시적으로 작동하는 기관이였다(거대한 전환, 104). 특정한 국가에 종속되지 않고 모든 정부와 접촉했고 어느 중앙은행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었고 중앙은행조차도 그 독자성을 해칠 수 없었다. 폴라니는 대표적인 오트 피낭스로 로스차일드 가문을 지목하고 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전세계의 영업망을 갖춘 하나의 단일한 국제적 가문이었고, 철저하게 영리만을 목적으로 하였다. 로스차일드가 제공하는 신용이 당시 성장하던 세계 경제의 산업활동을 정치 영역의 정부를 이어주는 유일한 연결고리였다. 이들은 수많은 국지전에 자금을 조달함으로써 재산을 축적했고, 도덕적 고민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단 강대국간의 대규모 전쟁은 자신의 재산상실과 연결되었기 때문에 강대국간의 전면전을 피하고자 하였다. 오트 피낭스와 유럽협조체제는 각 지역의 각종 혁명과 반란을 물리력을 동원하여 진압하였다. 그리고 오트 피낭스는 일국의 산업 활동에 대한 투자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의 은행, 공공시설 사기업에 대한 장기 대부 활동도 하였다. 오트 피낭스는 강대국뿐만 아니라 약소국의 정책결정에도 개입하였다. 외채를 얻는 것과 기존 외채의 갱신은 그 나라의 신용을 좌우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헌정주의를 채택한 자유주의 국가들은 자국의 통화가치가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급작스런 전쟁에서 정부 재정의 건전성을 악화시키는 정책을 회피해야만 했다. 어떤 나라라도 통화가치의 변동을 최소화하려는 금본위제를 수용한 이상 이는 엄격한 구속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터키가 1875년 금융 채무 불능을 선언하자, 곧바로 군사적 충돌이 일어났다. 하지만 베를린 조약 체결과 오스만 제국 채무관리위원회 설립을 내용으로 하는 무하렘 칙령에 의해 평화가 유지되었다. 강대국의 식민지 전쟁을 통해 구축한 식민지에서도 오트 피낭스는 활동하였다. 오트 피낭스는 식민지의 비공식 금융행정을 맡는 방식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확보하였다.

 

무역 역시 국제금융과 관련되었다. 무장 상인, 탐험가들, 신대륙 정복자들, 노예사냥단과 노예상인, 동인도회사 등은 국제통화 체제에 의존하게 되었다. 무역은 평화를 필요로 하지만 전면전이 벌어지면 무역은 중단되고 국제통화체제 역시 기능이 멈추게 되었다. 따라서 강대국들은 평화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이미 세력균형 자체만으로는 평화가 보장되지 않았다. 영리 활동과 금융은 수많은 식민지 전쟁에 책임이 있지만 강대국이 개입하는 전면전을 피할 수 있게 하는 기능을 하였다. “거의 모든 전쟁은 금융가들이 조직한 것이 맞다. 그런데 평화 또한 바로 그들이 조직한 것이었다.”(거대한 전환, 117) 이러한 실용주의적 평화는 전면전은 극도로 피하고 국지전은 끝없이 양산하는 가운데 영리 활동을 보장하는 것이 본질라고 폴라니는 강조한다. 다시 말해 유럽협조체제는 평화체제라기 보다 전쟁이라는 메커니즘을 통해 자신의 독립을 보존하는 개별 여러 주권국가들에 불과한 것이었다(거대한 전환, 119). 평화체제를 지원하는 하부구조인 경제체제가 무너지면 세력균형과 평화는 종말을 고해야 했다. 비스마르크는 유럽협조체제가 정점에 달할 때 의도적으로 평화야말로 유럽 강대국들의 공동 사업이라는 생각을 조장하고 다녔다. 하지만 독일이 쇠락하고 삼국동맹과 삼국협상이 형성되자 유렵협조체제는 종말을 고하기 시작했으며, 강대국들이 식민지 경쟁에서 충돌하자 세계 경제가 해체되기 시작했다. 오트 피낭스도 전쟁의 확산을 막을 능력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이것은 평화의 기초가 경제 조직임을 말해주는 것이며 19세기 경제 조직은 인위적 성격이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영국 산업혁명 초기 영국의 농촌에서 벌어진 종획운동은 농촌의 빈곤과 인구감소 등으로 평민들의 삶은 황폐화되었다. 이 시기 영국 왕실은 평민의 삶의 터전이 파멸되는 속도를 억지하는 조치들을 취했다. 하지만, 자유주의자들과 의회주의자들은 왕실의 이러한 조치들을 비난했다. 또한 이후의 역사가들조차도 왕실의 이러한 노력을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해 버렸다. 산업혁명 이후 영국 농촌에서 발생한 황폐화가 도시에서 재현되었다. “영국을 덮친 사회적 혼란 후의 산사태는 종획운동 기간의 그것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거대한 전환, 175)

폴라니는 두 가지 인간적 삶의 황폐화의 원인을 시장경제제도의 확립을 지적한다. 정교한 기계들과 공장 시설이 상업 사회에 도입되면 자기조정 시장이라는 아이디어가 생겨나게 되며 이것이 시장경제 제도를 확립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농업경제와 상업경제가 혼재되어 있는 사회와 달리 산업경제는 원자재와 노동을 구매하고 상인이 지시하는 방식으로 결합하여 생산물을 만들어낸다. 농업경제에서 산업경제로 이행함에 따라 생계유지 동기가 이익추구 동기로 대체된다. 이러한 전 과정을 위해 화폐가 필요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전 과정이 외부의 개입없이 작동되어야 한다는 원리가 요구된다. 이러한 시장경제로의 전환이 자연(원자재)과 인간(노동), 그리고 자본이 상품의 형상을 하게 되는 엄청난 변화를 내포하고 있다. 시장경제를 떠받치는 장치들은 종획운동과 산업혁명 과정에서 나타는 인간적 관계와 자연의 파괴를 피할 수 없다.

 

시장경제란 여러 시장이 모여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단일 체제를 형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거대한 전환, 180). 주류 경제학 이론을 살펴보면, “가격이라는 메커니즘이 작동하여 수요와 공급은 항상 일치하고, 그 과정에서 인간의 효용은 극대화된다. 완벽한 시장주의가 발현된다면 사회는 항상 최적의 상태로 유지되는 것이다. 하지만 칼 폴라니는 이러한 자기조정시장은 완벽한 유토피아에 불과하다면서 자기조정시장의 허구성을 주장한다. 폴라니는 스미스가 노동분업이 인간이 가진 어떤 사물을 다른 것과 물물교환, 교역, 교환하고자 하는 성향에 달렸다고 주장한 이후 경제적 인간의 모습에 대해 어떤 경제학자도 이의 오류를 지적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폴라니는 노동분업은 성적, 지리적, 개인적 자질의 차이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며, 시장에 의해 통제되고 조절되는 경제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볼 때 가격을 통한 시장 메커니즘은 그 복잡성의 차이는 있더라도, 인류의 탄생과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하지만 이러한 유구한 역사 속에서도, 완벽하게 자기조정시장이 형성되었던 시대는 없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시장이 사회운영의 단일변수가 되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으며, 아무리 이기적 유전자를 지닌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시장 이외의 다른 변수가 작용하여 이른바 합리적인시장 주의적 결정만이 이루어졌던 적은 없었다. 폴라니는 시장경제란 인류역사에서 존재한 바 없으며, 18세기 이후에 출현했지만 완벽히 작동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자유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 바대로 인간의 본성이 탐욕추구에 기반한다는 사고는 인간의 다양한 측면들을 경제적 이익에 종속시켜 버리는 결과가 나타난다.

 

칼 폴라니는 오로지 시장가격에 의해서만 지배되는 이러한 자기조정적 시장은 잠시도 존재할 수 없으며, 만에 하나 실현될 경우라도 사회를 이루는 인간과 자연은 아예 씨를 말려버리게 돼 있다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조기조정시장의 존재에 기반한 주류경제학적 논의를 비판한다. 칼 폴라니가 이토록 비현실적이라고 말한 자기조정 시장경제라는 유토피아의 형성은 산업혁명기의 기계제 생산으로 인해 시작되어 간다.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기계의 작동을 위한 보조적 위치로 하락시키게 되면서 기존의 생산주체로서의 인간 노동과 자연이 기계의 가동을 위한 투입물의 위치로 떨어지게 된 것이다. 이제 인간과 자연, 화폐는 상품처럼

취급된다. 그나마 최후까지 시장으로의 편입이 지연되던 노동마저도 스피넘랜드법의 폐지와 함께 경쟁체제에 편입된다. 칼 폴라니는 아담스미스의 국부론의 저술시점을 자본주의의 형성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는 1834년의 스피넘랜드법(빈민구제법)의 폐지에 따라 노동자들에게 주어졌던 보조금이 사라지면서 인민들의 생존이 임금노동으로만 가능하게 되고, 이에 따라 인간노동의 가격에 근거한 노동시장의 형성과 함께 자기조정 시장이 완성돼 현재의 자본주의가 도래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시장경제를 사탄의 맷돌이라고 표현한다. “사탄의 맷돌은 산업혁명이 인간을 통째로 갈아서 바닥 모를 퇴락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는 공포의 상징으로 칼 폴라니가 자기조정시장의 몰인간성을 대변하는 상징어이다.

 

칼 폴라니는 이러한 자기조정시장에 대한 비판 속에서 당시 시대의 문제점을 찾아낸다. 이데올로기의 주인이 되어야할 인간마저 상품화 시켜버린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그 근본부터 그릇되었다고 주장하며 이를 위해 적절한 해결방안으로 시장외부에서의 개입을 주장한다.

 

폴라니는 시장경제의 비인간성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에 내재되어 있는 그 근본적인 이데올로기적 허구성을 비판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칼 폴라니의 의도에 대한 심도있는 고찰 없이 단순히 그의 논지를 국가의 시장개입 정당화 수단으로만 여긴다면 냉전체제의 사회주의 경제의 실패를 답습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그의 논의의 본질인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인 문제점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바로 이 책에서 말하는 담론의 거대한 전환일 것이다.

 

칼 폴라니는 자본주의의 역사를 고찰하면서 시장 스스로 자유시장 영역을 만든 적은 없으며 오히려 국가가 시장을 구축해왔다고 주장한다. 인류의 역사상 자기조정시장이 지속적으로 부재하였던 것은 바로 국가가 적절한 개입을 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폴라니가 생각한 자본주의의 위기의 해결책은 국가의 개입이 아니라고 본다. 단순하게 국가의 개입이 해결책이라고 본다면 그의 사상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실험했던 계획경제의 수준에 머무를 것이고, 이미 냉전시대에 현실적으로 실패한 이러한 사상을 복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폴라니의 핵심사상은 바로 국가도 시장도 아닌 사회이다. 그가 말하는 사회에는 생활협동조합, 노동조합, 지방자치단체 등 다양한 집단이 포함된 “social”을 의미하는 것이지 권력적 집단인 국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이 중심이 된 집단이 사회를 이루고, 이러한 사회의 구성요소 들이 상호 협력과 견제를 통하여 경제, 정치를 움직이는 것이 바로 폴라니가 생각한 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한 해결책 이라고 생각된다. 폴라니는 지속적으로 인간의 자유가 근간이 된 체제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실패의 근저에는 인간소외의 이데올로기적 결함이 있음을 비판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중심이 되는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시장경제의 주체가 시장에서 인간으로 변화하는 것이 바로 칼 폴라니가 말하는 거대한 전환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