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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

결혼제도와 식민 통치

달고양이 Friday 2023. 5. 3. 10:55

한국사회에서 결혼은 법률적 행위(혼인신고)를 통해서만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 혼인관계는 지역 공동체나 가족 혹은 지인들로부터 인정반는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굳이 왕에게 혼인사실을 인정해달라고 간청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다만 조선시대에 호구조사가 이루어져서 인구를 관리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습니다. 호구조사를 바탕으로 가족관계의 사실과 권리가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혼인관계는 혼례식을 통한 가족 마을 등의 공동체가 인정하는 관습에 의해 인정받았을 뿐입니다.

하지만 근대국가 체계가 도입되면서 점차 혼인도 법률적 행위를 통해서만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1909년 민법이 도입되면서 혼인 신고 제도고 강제되기 시작했고, 1922년 민사령과 조선호적령이 시행되면서 혼인신고가 혼인관계 인정하는 효력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조선인이 그렇게 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당시 조선인들은 출생신고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혼인신고도 잘 하지 않았다고 추청됩니다. 혼인신고 안했다고 살아아가는데 불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혼인신고 제도가 필요했던 것은 식민지 권력이었습니다. 그럼으로 식민지 통계를 사실 혹은 진리를 담지하고 있다고 오인해서는 안됩니다.

혼인신고가 강제된 시기는 1909년 3월 「민적법民籍法」의 시행 이후이다. 호주가 본인이나 자녀 등의 혼인을 10일 이내에 신고하도록 하였으며 이를 어기면 처벌하여 혼인신고를 강제하였다. 그리고 「민적법집행심득民籍法執行心得」에서는 호구기재양식을 규정하여 부부관계를 공식적으로 표시하였는데, 여전히 당사자가 아닌 아버지 등 주혼자主婚者의 의사를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혼인의 효력은 관습에 따라 혼례식을 거행하는 것으로 발생하였고, 민적신고는 혼인을 공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https://folkency.nfm.go.kr/kr/topic/detail/543
1922년 「조선민사령」을 개정함과 동시에 「조선호적령朝鮮戶籍令」을 시행하였다. 이에 따라 1923년 7월 1일부터는 부윤府尹 또는 면장에게 혼인을 신고해야 효력이 발생하는 것으로 하였다. 이때부터 신고하지 않은 혼인은 법률상 혼인이 아니었으며, 따라서 법적인 보호를 받지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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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권력이 인구를 관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강제력과 효력을 지닌 법률을 도입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1921년 7월 조선총독부 내무국에 사회교화사업을 담당하는 ‘사회과(社會課)’ 조직이 설치되었습니다. 일제는 '노동하는 조선인'으로 개조작업을 시행하게 됩니다.

총복부가 1918년 토지조사사업을 끝내자, 조선사회는 대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토지를 잃은 조선인들이 자살하는 사례가 급증했던 것입니다. 언론은 식민지 지배의 효과성을 의심하는 기사들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식민지 권력은 구휼정책에서 빈민을 방지하는 정책으로 선회합니다. 이 때부터 전국에 보통학교가 설립되기 시작하는데, 이것 역시 이런 정책에 따른 것입니다. 제 초등학교 모교도 이 당시에 설립(1924년 11월)되었습니다. 회사령이 제정되고, 각종 조합들을 설립할 수 있는 법령이 제정되기 시작합니다. 이 때 부터 자본주의 제도가 운영되기 시작했고, 경쟁원리가 조선인들 사이에 자리잡기 시작합니다. 식민지 조선에서 개별이익과 집단이익이 중요한 사회 운영 원리로 자리잡게 됩니다. 민족주의 세력이나 사회주의 세력도 다른 방향을 모색하지 못한 채 제도틀 안으로 흡수되기 시작합니다. 각기의 노선에 따라 각종 조합이 만들어지지만,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은 서로 경쟁하거나 배제하기 시작합니다. 일제의 입장에선 식민통치가 용이해지게 됩니다. 

아무튼 인구 관리가 중요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주하는 조선인 통계도 이때 관리되기 시작하고, 혼인여성에 대한 통계도 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각종 통계자료를 조선인이 볼 수 있는 곳에 비치하여 스스로 사업기회를 포착하도록 환경을 조성하고 잉여노동을 열도로 보내 노동하는 조선인을 양성합니다. 혼인여성은 잠재적인 미래 노동력을 생산하는 대상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래서 관리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혼인제도는 단순히 법률적으로 효력이 있는 것만이 아니라 통치 제도로 작동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에 반하는 혼인은 사회가 인정하지 않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동성결혼에 반대하는 주장들을 보면, 식민지 통치와 부합하는 주장들이 꼭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동성결혼이 자녀의 출산과 양육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결혼을 자녀의 출산과 양육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이성결혼만 허용하는 것을 지녀야 할 윤리와 규범으로 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사회 윤리와 규범을 창출해야 합니다. 그리고 근대성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유럽 국가들도 탈근대를 모색하기 시작하는데 우리는 근대의 의미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혼의 법률화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다시 한번 고민해야 합니다. 결혼의 법률화는 동성을 규율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 모두를 규율 대상으로 합니다. 이 틀 안에서 살아가도록 규율되고 있을 뿐입니다, 피통치대상으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