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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합리성의 뿌리를 공격하라

달고양이 Friday 2014. 9. 8. 02:57

수유너머 대중지성 푸코 강의록 정치와 이성 2010. 11. 20 요약발제 한서

 

정치 합리성의 뿌리를 공격하라

 

 

푸코는 권력의 문제를 가지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다. 욕망이 있는 곳에 권력이 작동되고 있지만, 그가 보기에 권력은 실체가 아니라 ‘특정유형의 관계’일 뿐이다. 푸코에 의하면 권력이 결정되어 지는 것은 모든 사람 사이에 작동하는 관계에 의해서이며, 이 관계 속에서는 또한 부단히 합리화하려는 것이 동시에 작동되고 있다. 국가의 국민에 대한 통치, 인간의 인간에 대한 통치가 정당하다고 믿는 합리성, 그러나 푸코는 우리가 권력에 대하여 정작 저항하고 문제 삼아야 할 지점은 불합리한 제도 자체를 비판하거나 폭력에 관한 비난이 아니라 그것의 문제가 되고 있는 ‘합리성의 형식’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정신질환자나 광인에게 행사되는 권력의 비판이, 정신병 치료 제도에만 한정 되는 것이 아니다. 병원, 학교, 가정, 성, 지식 등의 수많은 담론과 경험의 장에서 변형된 모습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제안하는 것은 ‘정치적 합리성’의 뿌리를 공격하라는 것이다. 과도한 권력이 사회 도처에서 어떻게 합리화 되고 있는가? 그가 여기서 밝히고자 하는 것은 ‘합리화와 과도한 정치권력 사이의 관계’이다. 권력관계에 작동되는 합리화에는 그 나름의 고유한 형식이 있고, 인간에 의한 인간의 통치는 특정한 유형의 합리화를 수반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근대 국가의 이면에 인간을 개별화하고 전체화하는 정치합리성의 두 얼굴이 숨어있다. 그것은 서구사회의 역사 전체를 통해 성장하고 발전해 왔으며 국가를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동시에 개인을 권력에 대하여 더욱 의존적 존재로 만드는 효과가 있다. 근대 통치사상의 핵심인 개별화하고 전체화하는 권력은 고대 오리엔탈의 사목개념과 합리성의 결합된 사목 권력에 있다. 언제나 푸코의 작업이 그렇듯, 계몽주의 과업 중 하나가 이성의 정치권력을 증대시키는 것이라고 해서, 그는 쉽게 계몽주의에서 이 둘의 연원을 찾지 않는다. 그의 연구는 더 멀리 국가가 만들어지기 이전인 초기 기독사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1 권력의 사목양상의 유래

 

‘정치가=목자, 백성=양’이라는 은유는 그리스나 로마의 정치문헌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사목주제를 발전 강화시킨 것은 히브리인이었다. 물론 ‘목자’모델이 호머의 시들에서도 나타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권력의 위엄을 강조하는 의례적인 명칭에 불과했다. 변화는 그리스 시대 플라톤에게서 발견된다. 특히 ‘정치가’에서 그는 사목 권력을 핵심문제로 다루게 되는데, 우리는 여기서 인간의 목자인 ‘정치지도자’의 개념을 만나게 된다. 왕은 목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목자는 혼자서 자신의 무리를 이끈다. 양떼를 이끌고, 그들을 먹이고, 치료하고, 궁극적으로는 쉴 만한 물가로, 혹은 우리로 양떼들을 안전하게 인도한다. 목자와 함께 있는 한 양은 자신을 위해서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아도 된다. 왕은 혼자서 도시를 지배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사람들을 위해서 빵을 제공하고 병을 고치는 사람은 또 다른 시민이다. 이렇게 사람들 스스로 목자가 되는 순간 플라톤의 작업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하고 실패에 봉착하게 된다.

 

스스로 돌봐야 하는 인간의 시대에 신은 없다. 정치가는 결코 혼자서 모든 양들을 먹이고 보살피는 목자가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더 이상 목자일 필요도 없었다. 시민들은 생존을 위해서 스스로를 보살피는 ‘백성=목자’의 세계에서 그들의 역할은 목자가 양을 돌보는 것과 같은 세심한 돌봄이 아닌, 인간이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는 강력한 조직을 만드는 것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도울 수 있도록 조화와 우정에 기초한 공동체를 만드는 것. 도시와 시민들이라는 틀 내에서 사람들과 관계 맺으며 개인들의 삶을 배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끊임없이 신의 자리로 올라서려 하는 사목 권력의 테크롤로지는 그리스 로마 문명에서 매우 색다른 현상으로 출현하고, 히브리의 ‘목자와 양’테마에서 사목의 방식은 크게 바뀌게 된다.

 

기독교의 목자는 전체 무리의 운명을 책임지며, 양들과 목자 사이에 죄와 보상이라는 교환과 순환을 상정되고, 이 둘의 관계는 완전한 의존관계로 총체적이고 영구적인 복종의 미덕이 된다. 또한 기독교적 사목은 목자와 개별적인 양들 사이에 특정 유형의 지식, 즉 양들 하나하나를 개별화하는 지식을 함축하고 있다. 목자는 개별 양들의 상태를 아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의 개별적 물질적 욕구, 나아가 그의 영혼에서 이루어지는 내밀한 죄까지 모든 것을 파악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헤레니즘 문화의 ‘양심의 교도와 자기진단’이라는 도구를 변칙 차용하여, 사목테마를 더욱 정교화 된 권력기구로 발전시킨다.

 

고대 말에 서유럽 쪽에 나타난 사회, 푸코는 이 사회를 가장 공격적이고 정복적인 사회일 거라고 말하고 있다. 이들은 극소수의 목자가 다수의 사람들을 양떼처럼 다루는 낯선 권력의 테크롤로지를 발전시켰고, 인간을 관리한다는 사목 테크롤로지는 통치에 대한 고대 사회의 구조를 근원적으로 붕괴시키는 것이었다. 이 붕괴의 중요성은 진단, 고백, 교도, 복종 등의 모든 기독교적 테크닉이 현세와 자기부정, 죄와 죽음으로 연결되는 자기정체성을 만들게 되고, 경험(광기, 질병 성, 자기 정체성 등)이 복합적인 지식체계(정신의학, 범죄학, 성의학, 심리학 등)과 결부되면서 사목을 가장 정교화 된 권력구조로 발전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푸코는 경험과 지식, 권력, 이 셋의 트라이앵글에 의해 사목 영향력은 더욱 증폭되고 강화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지적을 한다. 만약 이런 사목조직이 통치로 제도화되지 않았다면 그것이 영구적인 관심과 부단한 투쟁의 문제가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의 사유의 놀라운 점이라고나 할까. 푸코의 저작들은 중간 중간 이런 질문들을 독자들에게 던져 줌으로서, 독자의 이성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일깨워 주고, 쉽게 결론을 도달하려는 것을 방훼하며, 제3의 사유로 나아가도록 충동질 한다.

 

2 특정유형의 정치적 합리성

 

이렇게 발전되어 온 사목 권력은 어떻게 국가와 결합되었을까? 푸코는 모든 권력관계에는 합리화가 작동되고 있으며, 사목과 국가의 결합을 가능하게 하는 것 역시 특정한 유형의 합리성이라고 말하고 있다. ‘국가이성’과 ‘폴리스이론’은 국가권력의 ‘합리성’이 반성적이며 그것의 특수성을 완벽하게 의식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보테로에 의하면 ‘국가이성’이란 국가가 형성되어 스스로 강화시키고, 지탱하고, 성장하는 수단에 대한 완벽한 지식을 의미한다. 이것이 일정한 규칙에 부합하는 하나의 테크닉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합리적 지식에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왕이 자기 왕국을 통치하는 것은 ”신이 자연을 통치”하는 것처럼 영혼이 육체를 통치하는 것처럼” 해야 한다는 성 토마스의 텍스트는 탈선한 국가권력, 통치기술의 모델이 자신의 법률에 신의 피조물을 부과하는, 신의 자리로 나아가고자 하는 음흉한 야욕을 명백하게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국가이성이 추구하는 것은 마키아벨리의 분석처럼, 군주와 국가사이의 관계를 유지하고 강화시키는가를 확정하는 것이 아니다. 통치기예의 목적은 군주가 자신의 통치영역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재강화가 아니라, 국가 그 자체를 재강화 시키는 것이다. 국가이성이란 국가의 힘을 증강 시킬 수 있는 합리적 통치, 광범하고 경쟁적인 틀 속에서 이와 같은 힘을 증강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통치인 것이다. 이런 국가이성에게 상이한 국가들 각각의 힘에 대한 구체적이고 정확한 지식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반면 폴리스이론은 제도가 아닌 통치기예이며, 국가가 개입하는 영력, 테크닉의 대상이었다. 튀르케, 들라르마, 폰 유스티 등의 이론들을 살펴보면 17,18세기 이런 폴리스이론들이 전반적으로 확산되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튀르케는 ‘귀족 민주적 군주제’의 제안에서 사람을 돌보는 두 개의 부서를 유용한 사람을 돌보는 부서와 사물(쓰레기로 분류되는 과부, 고아, 노인, 실업자등 가난한 사람들)들을 돌보는 부서로 구분 짓는데, 그에 표현을 빌리자면 폴리스의 진정한 대상은 인간이었다. 들라마르 역시 국가 안에서 폴리스가 돌아보아 할 것은 종교, 도덕, 건강 양식 도로 토목 공공건축물, 공안, 학예, 무역, 공업, 남자 하인과 노동자, 빈민이라고 열거한다. ‘폴리스’는 중앙 집권화 된 정치 행정 권력이 개입할 수 있는 모든 새로운 장을 포괄하는 용어가 된 것이다. 들라마르는 “폴리스는 인간의 행복과 관련된 모든 것을 돌본다.”고 하며 삶 자체를 폴리스로 보았다, 또한 후헨탈은 폴리스의 특정한 목적에 대하여 사회에서 생활하는 생생한 개인들로 규정하고 있다. 이들에게 폴리스는 행복이고 이익으로 이어지는 환상적인 기예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폰 유스티는 폴리스에서 핵심적인 패러독스를 집어낸다. 즉 폴리스는 국가가 힘을 증가시키고 힘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한편, 시민들로 하여금 생존, 삶, 나아가 생활 등으로 이해되는 행복을 유지하게끔 해야 하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정의한다. 푸코는 이것을 근대적 통치기예, 혹은 국가합리성의 목적이라고 느끼고 있는 것을 완벽하게 정의하고 있다고 말한다. 개인들의 발전이 또한 동시에 국력의 강화를 촉진하게끔, 개인들의 삶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여기서 폰 유스티는 ‘개인들의 생생한 집단’인 인구에 더욱 주목한다. 폰 유스티의 책을 읽으면 폴리스가 유토피아가 아닐뿐더러 체계적으로 분류된 법규의 개요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의 책은 국가, 즉 영토, 자원 인구 도시 등등이 관측될 수 있는 격자인 것이다. 그는 여기서 통계학을 통치기예와 결합시킴으로써 폰 유스티에게 와서 ‘폴리스학’은 통치기예이자 동시에 특정 영토 안에 사는 인구에 대한 분석방법이 된다.

 

우리는 위에서 서양 역사 전반에 걸쳐 사목 권력이 발전되어 왔으며, 권력들 사이에 작동되는 특이한 합리성에 의해 국가와 결합 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언제나 그가 찾아내고 발견해낸 것들을 친절하게 설명하고 되풀이하여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가령 ‘정치적 합리성’에 내재되어 있는 위험성을 말하기 위해서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을 걷어 냄으로써 그것이 왜 합리적이 아닌지를 보여준다. 그는 쉼 없이 말들을 쏟아내고 있지만 정작 독자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그의 침묵이다. 찬성도 반대도 없는, 일체의 가치판단을 보류한, 발견한 사실 외에 모든 것이 부재로 남겨 놓는 방식, 그는 왜 보여 주는 것 외에 어떤 말도 하지 않는 침묵의 대화법을 시도하는 것일까. 욕망이 있는 곳에 권력관계가 존재하고, 권력관계가 있는 곳에 무수한 합리화가 작동된다. 그는 그 합리성을 공격하라고 말한다. 매 순간 나에 대하여 혹은 타자에 대하여 작동되는 합리성의 뿌리를 찾아 탐색하고 사유하는 것, 그 사유의 과정 속에서만이 인간은 자기 앞의 길을 보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의 침묵은 그가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사유의 지평 속에서 자취를 남기고 걸어갔던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사유 속에서 각자의 길을 걸어가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