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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를 여는 생각
정절의 역사-조선 지식인의 성 담론
이숙인 지음
푸른역사 펴냄
18세기 조선의 ‘개혁 군주’로 흔히 여겨지는 정조는, 여성의 눈으로 보면, 전혀 다른 얼굴을 지녔다. 보수도 이만저만 보수가 아니다. 성리학적 가부장 체제의 완고한 수호자, 극보수다.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의 <정절의 역사>는 조선 500년 동안, 후기로 갈수록 더 혹독하게 여성에게 요구됐던 ‘정절’을 열쇳말 삼아 성리학자요 정치가인 조선 (남성) 지식인과 유학의 이중적인 얼굴을 문헌을 통해 가감 없이 드러낸다.
정조 때 중범죄 판례집 <심리록>에서 1783년 ‘취삼 사건’을 보자. 취삼은 자기 처와 간통한 걸로 의심되는 남자를 때려 죽였는데, 취삼 처 김씨는 실은 간통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한데 정조는 김씨가 간통 무고 주장을 편 것을 문제삼았다. “차라리 간통을 덮어쓸망정 지아비를 죽을죄에서 살려낼 방도를 꾀했어야 하는데 끝내 이런 뜻이 없”어 “윤리가 사라졌다”고 했다. 이듬해 아내를 죽인 남편 ‘삼한 사건’에서 정조는 “지아비를 사형에 처한다면 죽은 여자의 마음에 흡족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며 남편을 방면했다. 남편에게 살인죄를 적용하는 것이 남편한테 죽임 당한 아내의 마음을 편치 않게 할 것이라는 논리다.
개혁적 지식인으로 평가되는 실학자 이익은 남편이 죽어도 개가하지 않는 여성이 양반뿐 아니라 전 계층으로 확대되는 상황을 일러 “중국도 따라오지 못할 아름다운 풍속”이라고 했다. 이덕무는 <양열녀전>을 지어 열녀를 칭송하고, 남편 죽고 수절한 ‘절부’, 따라 죽은 ‘열부’로 여성 정절을 좀더 세분화하여 ‘관리’하고자 했다. 이런 지식인 대열은 앞뒤로 조식, 허목, 안정복, 최익현을 비롯해 끝없이 이어졌다.
허미경 기자 carmen@hani.co.kr
그림 푸른역사 제공 |
그림 푸른역사 제공 |
‘부부의 서로 사랑’이 아닌
‘아내의 일편단심’으로 둔갑했다
재가자의 자손은 관직에서 배제했다
자손을 볼모로 부녀를 감시한 것이다 평생 수절하는 일은 주목도 못받았다
절부 가운데 상당수는 자결이었다
열녀 포상은 부계혈통주의에 기반한
성리학적 이상이 빚어낸 비극이었다 조선 개국 세력은 사회통합의 일환으로 정절 개념을 내세웠다. 중국 유학 경전에서 방법과 사례를 수입했다. 기본적으로는 가부장권 옹호의 맥락에 있었지만, 개국 초기 정절은 애정에 바탕한 두 배우자의 상호 의무 개념이었다. 정도전의 <조선경국전>(1394)은 ‘부부는 인륜’이요 ‘군자의 도는 부부에서 출발한다’는 <중용>의 논리를 내세워 남녀의 정욕을 국가가 통제해야 한다고 했다. 태조는 즉위교서에서 “충신, 효부, 의부, 절부를 권장”했다. 의부(義夫)는 정절 혹은 신의를 지킨 남편, 절부(節婦)는 정절을 지킨 아내다. 그러나 “절부와 짝을 이루는 ‘의부’의 존재와 담론은 건국 60년이 지난 1454년(단종 2년)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정절 개념은 이후 <경제육전>과 이를 모본 삼아 계속 사례가 추가되는 법령집 <속육전>에서 조금씩 변모하여 성종 때 편찬된 <경국대전>에서는 마침내 “실행한 부녀의 자식은 과거 응시를 불허한다”로 정리됐다. “대개 실행녀의 남성 가족들은 관직에서 물러나거나 관직 진입이 봉쇄됐다. 자손을 볼모로 실행 부녀를 감시·검열한 것은 조선 사회 정절 문화의 특징”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퇴계와 율곡이 시작한 향약은 그 지역 사림조직과 결합하여 더욱 ‘절부’(정절녀) 이데올로기를 부채질했다. 실행을 저지른 양반 여성에 대한 처벌은 가혹했다. 정절은 여성이 생존을 위해 지켜야 할 의무로 강제됐다. “충신은 두 임금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얻지 않는다”는 명제 아래, 정절의 의무를 다하라고 국가가 적극 나섰다. 국가는 ‘법 가부장’이었다. 태조 원년(1392)부터 고종 때(1903)까지 절부, 열녀 발굴 사업이 끊이지 않고 벌어졌다. 여성들은 정절 이념을 내면화시키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조선 전기(태조~명종)에 국가 차원에서 절부로 선정된 여성은 272명, 후기(선조~고종)엔 845명이다. 초기에는 개가 거절이나 단순 수절만으로도 절부로 선정됐으나, 후기에는 세종의 말처럼 “특이한” 서사가 필요했다. “남편이 병을 앓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이고”, “제 넓적다리를 베어 삶아 남편을 먹이고”, “참으로 옛사람에 부끄럽지 않게 차분히 남편을 따라 자결”하고, “19살에 과부 되어 수차례 자결을 시도하다 끝내 굶어 죽었다”는 식의 극한의 서사가 양산됐다. 벼슬에 나설 일이 없는 상민·천민계급에서까지 열녀가 나왔다. 19세기에 이르면 평생 수절은 당연한 일로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조선 후기 절부의 상당수는 죽은 남편 뒤를 좇아 자결하는 ‘하종’을 택한 경우였다. 열녀문, 정려각 같은 열녀 포상은 부계혈통주의에 기반한 성리학적 이상이 빚어낸 국가적 비극이었던 셈이다. 책은 남녀간 정욕을 국가가 통제하려 했던 시도에서 시작된 ‘정절 문화’가 조선 500년 역사의 맥락 속에서 빚어내는 그로테스크한 풍경을 드러낸다. 그 강도에 큰 차이는 있겠지만, 오늘이라고 아주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허미경 기자 carmen@hani.co.kr, 그림 푸른역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