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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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 연인들이 나눴던 '사랑의 기술'
13세기 스코틀랜드의 성. |
중세 유럽의 생활은 우리 고려시대 사람들 생활상과 별로 다르지 않았어요. 그 시절 유럽인들은 양털을 다듬어서 실을 짜거나, 마(麻, flax)를 물에 불려 뜯어내 그 껍질로 옷을 만들어 입었지요. 영주들이 살던 성(castle)에는 술을 만드는 양조시설과 함께, 양털이나 마를 다듬어 옷을 만드는 시설이 대부분 함께 갖춰져 있었어요. 베틀로 천을 짜거나, 안동소주 같은 증류식 술을 만들었던 고려시대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그런데 놀라지 마세요. 중세 유럽의 귀족은 자기 집에서 ‘당당하게’ 오줌을 쌌어요. 다른 곳도 아닌, 거실에서 말이지요. 정말이에요. 가족이 있든 없든, 손님이 있든 없든 상관하지 않고 거실에서 ‘시원하게’ 오줌을 눴어요. 뿐만이 아니었어요. 중세 유럽에선 말이나 개 같은 동물들이 거실에서 마구 뛰어다닐 수 있게 했어요. 말 그대로 ‘개판’이었던 거죠. 당시 유럽인들은 귀족이건 평민이건 가리지 않고, 동물들과 함께 생활했어요. 돼지와 고양이 같은 동물은 거실에서 키우지 않았지만, 말과 개 그리고 매는 ‘점잖은 동물’이라 여겼어요. 그래서 집안 거실에 들어와 마구 돌아다니게 했던 거예요.
중세 유럽의 성엔 거실까지 말을 타고 들어오는 손님도 많았어요. 물론 이 경우엔 주인의 허락을 얻어야 했죠. 집안에 들어오는 손님은 장갑과 모자를 벗는 것이 예의였는데, 여기엔 예외가 있었어요. 바로 대머리였죠. 대머리의 경우엔 예외적으로 모자를 벗지 않아도 양해해 주었다고 해요.
그 시절엔 손님과 적을 별다르게 구별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손님’을 뜻하는 영어 단어 guest가 고대 영어로 ‘손님’ 과 ‘적’ 둘 다를 뜻했다고 하니까요. 손님이 하루 아침에 적으로 돌변하기도 하고, 또 적이 손님인 척 하기도 하고 했으니까, 이 두 가지를 구별할 필요가 없었던 것 같아요.
이같은 중세 유럽의 생활풍습은 ‘교양 있는 사람의 책(The Book of the Civilized man)’이란 13세기 고서에 잘 기록돼 있어요. 이 책은 ‘다니엘 베클스(Daniel Beccles)’란 사람이 쓴 것으로, 중세 영국의 생활 예절과 에티켓을 자세하게 기록해 놓은 중요한 사료예요.
현대인의 시각으로 보면, 이 책은 상당히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어요. 예의 바르게 똥을 누는 법, 법도에 어긋나지 않게 오줌을 누는 법, 매너를 갖춰 트림(burp)을 하는 법, 심지어는 예절에 맞게 방귀(fart)를 뀌는 법까지 상세하게 기록돼 있기 때문이죠.
중세 유럽의 생활은 지금과 많이 달랐어요. 우리는 온돌이 깔린 따뜻한 바닥 위에서 생활하죠? 하지만 13세기 영국의 귀족은 그냥 흙으로 된 맨바닥에 침대를 놓고 생활했어요. 거실 바닥에 오줌을 누는 것도 바닥이 흙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죠.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요즘처럼 벽에 도배를 하고 방 바닥에 장판을 깔았다면, 거기에 대고 어떻게 오줌을 쌀 수 있었겠어요? 그리고 어떻게 동물이 돌아다니도록 내버려 둘 수 있었겠냐요? 말이나 개 같은 동물이 거실 안을 멋대로 돌아다니게 내버려 둔 이유 역시 바닥이 맨땅, 즉 흙이었기 때문이었죠. 영화에 보면 중세 귀족의 거실에 멋드러진 카페트가 깔려 있는 것으로 나오죠? 하지만 바닥에 카페트를 깔기 시작한 것은 14세기 이후의 일이었어요. 그 전에는 그냥 ‘맨 땅’이었을 뿐이예요.
그런데 말이죠, 아무리 중세라 하더라도 누구나 다 거실에서 오줌을 쌀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교양 있는 사람의 책’에 따르면 거실에서 오줌을 눌 수 있는 것은 집주인만 갖고 있었던 특권이었어요. 다시 말해 손님이 주인집 거실에 오줌을 싸는 것은 엄청난 실례였죠.
하지만 말을 타고 거실 안까지 들어가는 것은 집주인의 허락만 얻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어요. 영국 왕 헨리2세는 자신의 신하이자 대법관이었던 토마스 베켓(Thomas Becket)의 집에 자주 놀러 갔는데, 말을 탄 채로 집안으로 들어가서는 ‘훌러덩’ 식탁을 뛰어넘어서 식탁으로 다가가 밥을 먹었다고 하네요.
헨리2세의 신하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토마스 베켓은 1162년에 켄터베리 대주교가 됐어요. 그런데 대주교가 된 뒤엔 지금까지의 태도를 싹 바꿔버렸어죠. 안면 몰수하고선 ‘왕이 권한을 남용해서 성직자를 좌지우지하려 한다’며 왕을 공격하고 나섰어요. 왕한테 정면으로 대든 거죠. 헨리2세는 배신감을 느꼈어요. 절친한 친구가 자신을 공격하고 나선 거잖아요. 하지만 베켓의 입장은 왕과 달랐어요. 아무리 왕이라 하더라도 ‘신의 대리인’인 성직자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던 거죠.
이 문제로 왕과 베켓은 심한 갈등을 빚게 돼요. 그러다가 결국 베켓은 켄터베리 대성당에서 살해되고 말죠. 전설 같은 이야기지만 베켓이 살해될 때 그의 목에서는 흰 피가, 몸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고 해요. 이 이야기기 퍼져나가자 사람들은 베켓을 ‘켄터베리의 성자’라고 부르게 됐어요. 수 많은 크리스찬들이 떠나는 ‘켄터베리 순례’는 바로 이렇게 삶을 마친 토마스 베켓의 죽음에서 비롯된 거예요.
비누가 변변치 않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자주 씻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말이죠, 귀족의 몸에도 벼룩이나 이 같은 벌레들이 득시글거렸어요. 발 냄새, 땀 냄새, 몸 냄새는 말할 수도 없을 만큼 지독했죠. 정말이예요. 그래서 귀족이라 하더라도 남의 집 거실에서 몸의 벼룩을 잡거나, 신발을 벗으면 절대로 안됐어요. 그런 행위는 절대로 해선 안될 무례한 행동이었거든요.
당시의 연인들은 서로 서로 몸에 있는 벼룩이나 이를 잡아주곤 했어요. 서로를 아껴준다는 ‘사랑’의 의미였지요. 원숭이가 서로의 몸에서 벼룩을 잡아 주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거죠.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좀 찝찝하긴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엄연한 사실이에요. 사람도 뭐… 기본적으로는 동물이니까요.
사람도 원숭이처럼 서로 이를 잡아주고 살았던 중세엔 공업이 발달하지 못했어요. 당연히 칫솔 같은 도구도 없었겠죠? 그래서 이빨을 닦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당시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부러뜨린 다음, 잘라진 쪽을 자신의 이빨에 대고 문지르면서 양치를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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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었어요. 중세 유럽엔 옷감도 매우 귀했어요. 대부분의 성에는 옷감을 만드는 도구가 갖춰져 있었는데, 그 이유 역시 옷감을 구하기가 그 만큼 힘들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중세엔 옷을 길게 입는 사람을 부자라고 여겼죠. 가난한 사람일수록 옷을 짧게 입고, 돈이 많은 사람일수록 옷을 길게 입고 다녔던 거예요. 그래서 돈이 많은 귀족 여성은 길다란 스커트 위에 셔츠를 입고, 그 위에 겉옷을 입은 뒤, 다시 그 위에 모피를 두르고 다녔어요. 날씨가 추워지면 다시 그 위에 망토를 하나 더 두르기도 했죠.
당시엔 셔츠 하나를 입는 것이 그야말로 보통 일이 아니었어요. 요즘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번거로운 일이었거든요. 영화를 본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을 거예요. 중세 유럽인들의 셔츠는 가슴 언저리에 레이스 같은 장식이 달려 있고, 옷소매가 팔뚝에 착 달라붙은 모습이었다는 걸 말이에요.
혹시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소매가 저렇게 짝 들러붙을 수 있을까’ 하고 궁금해 했던 적은 없었나요? 그 비밀은 바로 바느질이었어요. 셔츠를 입고 난 뒤, 가만히 서 있으면, 그 옆에 서서 누군가가 바느질을 해 줬던 거죠. 소매 끝이 팔뚝에 꼭 맞도록 하나하나 일일이 꿰매줬던 거예요. 그러니까 입는 것은 물론이고, 셔츠를 벗는 것도 이만저만 귀찮은 일이 아니었던 거예요.
서로 사랑을 나누려는 연인이나 부부가 있다고 생각해 봐요. 옷을 벗는 일이 정말 ‘엄청난 일’이지 않았겠어요? 그래서 주목받은 것이 단추였어요. 말 그대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지요. 일일이 꿰매지 않아도 척척 입고 벗을 수 있었으니 얼마나 편리했겠어요? 일부 귀족이나 달 수 있었던 단추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해주는 최고의 선물로, 젊은 연인들 사이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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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무렵 중세의 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낭만적인 곳이 아니었어요. 바닥이 맨땅이었기 때문에 잡초가 여기 저기 삐죽 솟아올라 있었고, 짐승이나 사람의 똥, 오줌, 침, 가래 같은 것들이 여기 저기 마구 흩어져 있었어요.
성주와 가족은 이런 황량한 성의 구석진 방에서 잠을 잤어요.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한복판에 있는 커다란 안방에서 생활한게 아니었다고요. 이유는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였어요. 성주와 가족들이 어디서 자고 있는지, 침입자가 알 수 없도록 했던 거죠. 그리고는 가족용 침실에 커튼을 둘러쳤어요. 다른 사람이 안들 들여다 보지 못하게 했던 거죠. 하지만 집주인은 방 안에서 밖을 바라볼 수 있었어요. 커튼에 작은 구멍을 뚫어놓고선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살폈던 거예요. 이 구멍을 영어로 squint라고 했어요. 이렇게 유래된 단어 squint는 ‘곁눈질’ 또는 ‘사팔뜨기’를 뜻하는 말로 바뀌어서,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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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귀족은 신분을 과시하기 위해서 의자에 천으로 만든 장막을 둘러 씌워 ‘폼’을 잡기도 했어요. 지금 보면 웃기는 이야기 같지만, 당시의 chair는 chairman이나 사용할 수 있었던 ‘권세의 상징’이었던 거죠. 헐….
출처 : 한민족역사정책연구소
글쓴이 : 통섭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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