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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비판- 자본주의 정신

달고양이 Friday 2014. 10. 18. 21:13

 

역사와 언어의 새로운 만남 개념사란 무엇인가

 

6. 자본주의 정신 - 신조어로 표현된 세기말의 근대비판

 

노래와 대도시들, 꿈의 눈사태, 색 바랜 땅들
명성을 잃어버린 남극과 북극, 죄지은 여인들
궁핍 그리고 영웅들, 유령의 부글거림, 레일 위의 폭풍
아득한 구름 속엔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리
민족들은 파멸되고, 책들은 마녀가 된다
영혼은 미미한 복합물로 쭈그러든다
죽음은 예술이다. 시간은 더욱 빨리 회전한다
오 나의 시대여! 이렇게 이름 없이 파괴되는구나
이렇게 별도 없이, 이렇게 인식 속에서 무가치하게
                                                            ―빌헬름 클렘

 

오늘날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개념은 긍정적 함의를 지닌 채 아메리카니즘이 모델이 된 이른바 ‘민주 자본주의’ 체제의 정당성을 변호하기 위해, 더 나아가 경제 성장과 근대화에 사람들을 동원하려는 각국의 사회 발전 이데올로기로 사용되고 있다. ‘민주 자본주의 정신’, ‘일본 자본주의 정신’, ‘한국 자본주의 정신’ 같은 슬로건의 유행은 이런 현상을 웅변해주고 있다.1) 근대화론자들의 담론에서 ‘자본주의 정신’은 ‘좋은 근대’의 의미론적 상징으로 쓰인다. ‘자본주의 정신’은 인류 역사상 가장 발전된 문명의 원동력으로 찬미된다. 그 개념 속에는 인간사회의 물질과 정신의 조화로운 진보를 향한 모든 유토피아적 염원들이 집약되어 있다.


그러나 1902년 독일의 국민경제학자 좀바르트(Werner Sombart)가 『근대 자본주의(Der moderne Kapitalismus)』에서 처음으로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개념을 사용했을 때나, 그 2년 뒤 좀바르트의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막스 베버(Max Weber)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에서 이 개념을 말했을 때, 이 개념은 단순히 사회 근대화를 위한 발전 이데올로기의 표어로서 사용되거나, 혹은 자본주의적 근대문명을 찬양하고 이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사용한 ‘자본주의 정신’ 개념 속에는 오히려 서구의 혁명적인 근대화 과정에 대한 불쾌함, 혹은 비관주의적 근대 진단과 심각한 위기의식으로 점철된 당대인들의 근대문명에 대한 비판적 담론이 응축되어 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자본주의 정신’ 개념을 사용하면서 당대인들의 근대문명 비판 담론을 특정한 방향으로 조직화하려 했다. 이처럼 ‘자본주의 정신’ 개념은 원래 근대문명에 대한 비판적 의식의 표현이자 동시에 문명 비판의 도구로서 기능했다.

 


●[그림] 〈원로원의 사장님들〉
조셉 케플러(Joseph Keppler)의 커리커처, 1890.


‘자본주의 정신’의 탄생 과정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신조어는 이보다 조금 앞서 출현한 ‘자본주의’라는 신조어에서 파생되었다. 19세기 중엽 프랑스에서 가장 먼저 쓰이기 시작한 ‘자본주의’라는 신조어는 이후 영국ㆍ독일 등에 수입되어 산업화로 인한 여러 사회적 모순들을 비판하기 위한 논쟁적이고 정치적인 표어로 사용되었다. 일반적으로 이 개념은 서유럽 각국에서 무엇보다 사회주의자들의 광범위한 사회 비판 슬로건으로 쓰였다. 독일에서도 이 개념은 특히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끈 사회주의 노동운동에 의해 주도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개념은 20세기 초반까지 모든 정파를 초월해 긍정적 함의보다는 부정적 함의를 지닌 채 저널리즘적인 투쟁 개념으로 사용되면서 공공 담론 속에서 유행병처럼 번졌다.2)


물론 사회주의 노동운동이 공격한 ‘자본주의의 질곡’과, 이를테면 보수주의적인 부르주아 사회개혁운동이 공격한 그것 사이에는 강조점의 차이가 있었다. 전자의 경우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임노동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생산양식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후자에게 자본주의란 무엇보다 자유방임주의를 모토로 한 ‘맨체스터주의(경제적 자유주의)’를 의미했다. 그리고 경제적 자유주의의 본질은―때때로 반유대주의와 결합되어―독일 노동자들의 피를 빨아먹는 사악한 (유대)유산계급의 경제 정책 내지 노동을 통하지 않은 이윤 증식을 누리려는 배금주의적 메커니즘으로 규정되었다.3)


이처럼 ‘자본주의’ 개념은 도덕적 가치관과 정치적 입장을 초월하여 산업혁명을 통해 등장한 새로운 사회 경제 질서를 비판하기 위한 정치적 투쟁의 도구로 쓰였지만, 동시에 이 개념은 ‘자본주의 시대’라는 이 시기의 유행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역사적 시대구분을 위한 개념으로도 쓰였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개념은 사회ㆍ경제적으로 역동적으로 발전하는 새로운 시대라는 역사철학적 함의를 강하게 내포한 채, 다양한 정치 이데올로기적 노선을 초월해 보편적으로 쓰이던 시대 개념이기도 했다.4)


그러나 독일 부르주아지가 산업사회와 근대 비판을 위해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에는 현실적인 한계가 있었다. 우선 이 개념은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선취되었기 때문에, ‘자본주의’ 개념의 과도한 사용은 부르주아 공중 사이에서 사회주의자 혹은 마르크스주의자라는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좀바르트가 그 대표적 예이다. 그는 자신의 『근대 자본주의』에서 최초로 ‘자본주의’를 학술용어로 도입했지만, 반응은 냉담했다. 이는 오히려 그가 ‘좌파’로 낙인찍혀 부르주아 국민경제학자들의 조합에서 국외자로 밀려나는 데 일조했을 뿐이었다.5)


그런데 부르주아 공중 사이에서 ‘자본주의’ 개념의 과도한 사용이 터부시되었던 것은, 단순히 이 개념이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선취되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산업사회 비판 담론은 1871년 독일제국 성립 이후 떠들썩하게 벌어진 사회주의 ‘미래국가’ 논쟁을 통해 보다 과격하게 조직화되었으며, 이 가운데 무엇보다 ‘자본주의’ 개념이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보다 급진적인 투쟁 개념으로 발전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자본주의’는 산발적인 사회 정책적 개혁이 아닌 ‘사회혁명’과 이를 통한 새로운 사회주의 시대의 도래라는 역사철학적 대전환의 시나리오 속에서 반드시 붕괴되어야 할 현존 사회의 총체적 질서, 혹은 보다 새로운 시대를 향한 과도기를 의미하게 되었다.6)


이와 더불어―혹은 이 때문에―부르주아 공중 사이에서는 사회 비판을 위해 ‘자본주의’ 대신 ‘산업주의’라는 개념이 더 큰 호응을 얻었다. ‘산업주의’는 전통적인 농업 지주가 주축이 된 보수주의 정치 집단과 그들의 국민경제학적 대변인들로부터 나왔는데, 이들은 산업화로 인한 사회적 모순들을 비판하기 위해 ‘자본주의’보다는 ‘산업주의’라는 개념을 선호했다. 보수주의자들에 의하면, 모든 사회악의 근원은 ‘산업’에 있었다. 이처럼 ‘산업주의’ 역시 정치적 투쟁 개념 및 시대 개념으로 쓰이면서, ‘자본주의’ 개념과 유사한 기능을 수행했다.7) ‘산업주의’ 개념의 유행은 특히 1890년대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1902년 뷜로(Bülow) 내각 당시 절정에 달한 보호관세 논쟁 때문이었다. 1890년대 초 카프리비(Caprivi) 내각 시기 인하되었던 농산품의 관세를 다시 높이려는 보수주의자들의 시도는, 필연적으로 자유무역을 옹호하는 자유주의자들과 보호관세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이 논쟁은 단순히 농산물의 관세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고, 동시에 신생 독일 민족국가의 미래 전반을 둘러싸고 ‘산업 국가냐 농업 국가냐’라는 보다 포괄적인 논쟁으로 확대되었다. 이 논쟁에서 ‘산업주의’는 다수 부르주아 공중의 지지를 얻은 보수주의자들이 소수의 산업 지향적 자유주의자들을 향해 사용한 날카로운 공격 무기로서 기능했다.8)


‘자본주의 정신’ 개념은 이런 담론적 배경에서 나왔다. 또 이런 담론적 배경은 독일제국의 정치ㆍ사회적 배경과도 무관하지 않다. 일찍이 비스마르크에 의해 도입된 보통선거권은 갈등을 증폭시키는 방향으로 대중민주주의의 발전을 가져왔다. 무엇보다 사회민주당이 지도하는 노동운동은 1903년 제국의회 선거에서 제1당의 자리를 차지할 만큼 부르주아지에게 위협적인 대중운동으로 성장했다. 동시에 독일제국의 정치사는 독일사의 ‘특수 경로’ 테제가 나올 만큼, 봉건적 농업 지주 세력과 그 정치적 대변인인 보수주의 세력(기존의 보수당 및 ‘농부동맹’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보수주의적 대중 조직)의 정치ㆍ문화적 헤게모니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철과 귀리’의 연합이라는 중공업 자본가와 융커의 사회적 결집의 기반 위에서 중도 우파적 부르주아 정당들은 보수당과의 결집 정책을 통해 겨우 목숨을 연명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자본주의 정신’ 개념은 혁명적 사회주의 노동운동과 농업적 보수주의 세력에게 공공 담론의 주도권을 빼앗긴 채 정치ㆍ사회적으로 이들 양대 세력의 위협 앞에 노출된 부르주아지 ‘근대주의자’9)들의 비관적 시대 진단에서 유래한다. 근대 산업사회에 순응하려 했던 이들 부르주아지 ‘근대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개념을 통해 역설적이게도 근대 산업사회의 근본적인 문제점에 대한 공격, 즉 본격적인 근대문명 비판을 시도했다. 이들은 ‘자본주의 정신’ 개념을 통해―이미 의미론적으로 ‘정신’을 강조함으로써―무엇보다도 근대 산업사회의 정신적 측면, 즉 근대적 세계관과 문화적 전개 양상이 갖는 취약점을 비판하고, 부분적으로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려 했다. 물론 부르주아지 ‘근대주의자’들의 본격적인 문명 비판은 현실적인 수세를 극복하고 새롭게 정치ㆍ사회ㆍ문화적인 헤게모니를 잡으려 했던 그들의 열망과도 밀접한 관계를 지녔다.
그렇다면, 슈퇴커(Adolf Stöcker, 1835~1909), 막스 베버(1864~ 1920), 그리고 좀바르트(1863~1941)가 부르주아지 ‘근대주의자’들 가운데 특히 문제가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보다 이들의 개인사 자체가 지금까지 언급한 부르주아지 ‘근대주의자’들의 위기 상황을 웅변적으로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궁정 설교사 슈퇴커는 정치적으로나 세계관적으로 철저한 보수주의자였다. 그는 모든 근대적 세계관에 대해 비타협적인 루터교의 전통적 교의에 충실한 이른바 정통파 신학자였으며, 엘베강 이동의 대지주, 즉 프로이센의 융커가 주도하는 보수당에 변함없는 충성심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매우 근대적인 보수주의자였다. 그는 다수결 원리보다는 권위, 민주적이고 평등한 것보다는 위계질서와 엘리트주의를 선호하던 다수의 보수주의자들과 달리, 보통선거권의 의미와 산업 대중의 정치적 중요성을 깨달은 보수주의 진영 내의 선구자였다. 이와 함께 그가 누구보다 앞서 선동 정치라는 새로운 정치 스타일을 보수 진영에 도입했다는 점 역시 지적되어야 한다.10)


슈퇴커는 1860/1870년대를 지나면서 성장하기 시작한 사회주의 노동운동에 맞서, 농촌 중심의 보수주의를 도시 중심의 인민주의 운동으로 새롭게 변화시키려 했다. 그는 무엇보다 대도시 베를린에서 수세에 몰린 보수주의를 중하층 계층(Mittelstand)과 노동계급을 축으로 하는 근대적 인민정당운동으로 탈바꿈시키고자 했다. 그는 실제로 기존 보수당의 틀 내에서 1870년대 후반 이후 기독교사회노동자당(Christlichsoziale Arbeiterpartei), 기독교사회당(Christlichsoziale Partei) 등을 비롯해 수차례 보수주의적이고 반유대주의적인 대중정당을 결성했다. 그의 이런 정치적 시도는 근대적 사회 정책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 그리고 기존의 부르주아 사회 개혁의 노력을 강단 사회주의적 아카데미즘과 기독교의 순수한 사회윤리운동의 성격에서 탈피시켜 대중민주주의의 시대에 걸맞은 근대적 정치운동으로 변화시키려 했던 그의 구상과 맥을 같이한다.11) 실제로 슈퇴커가 아니었다면, 1890년에 만들어진 개신교 사회회의(Evangelisch-sozialer Kongress)라는 부르주아지의 근대 산업사회에 대한 비판과 사회 정책적 논의의 장도 마련되지 못했을 것이다. 앞으로 살펴볼 좀바르트와 막스 베버의 문제의식 및 시각 역시 개신교 사회회의를 통해 구체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12)


그러나 비록 그 스스로는 보수주의의 원칙을 넘어서서 새로운 지평을 열려는 그 어떤 불경스러운 시도도 해본 적이 없었지만, 슈퇴커는 보수당 내의 전통주의자들로부터 대중 선동가로서 부단히 견제당하고 때로는 사회주의적 급진주의자로서 위험시되었다. 마침내 그는 이른바 제국 정부 정책의 ‘반동적 코스’가 시작된 1895/96년 무렵, 보수당 내 지주들, 중공업 자본가 및 농부동맹의 전투적 농업주의자들의 공격을 받아 결국 당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한마디로 슈퇴커는 전통주의와 근대주의자 사이에 선 경계인이었다. 전통주의자들에게 그는 보수주의를 근대화시키려는 근대주의자였고, 근대주의자들에게는 근대적 의상으로 위장한 전통주의자였다.


좀바르트와 베버는 매우 유사한 이력을 갖고 있다. 우선 둘 다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의 전통을 지닌 엘리트 시민계급 가문에서 성장했다. 좀바르트의 아버지는 설탕 산업을 통해 성공한 기업가이자 기사령(Rittergut) 소유자로, 프로이센 의회와 제국 의회의 민족자유당(Nationalliberale Partei) 의원으로 정치적 경력을 쌓은 자유주의 정치가이자 대부르주아였다.13) 베버의 아버지는 민족자유당 소속의 베를린 시참사회 의원이자, 프로이센 의회 의원으로서 매우 영향력 있던 민족자유주의 정치가였다.14)


독일의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자들은 1860년대 독일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유토피아를 갖고서 헌정운동을 주도했으며, 1870년대 비스마르크와 연합하여 신생 독일제국의 집권당 노릇을 했다. 이 가운데 민족자유주의자들은 독일 민족의 문화적 진보라는 기치를 내걸고 이른바 ‘문화 투쟁’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비스마르크의 가톨릭 탄압에 적극 동참했다. 이처럼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자들은 신생 독일 민족국가를 만들어낸 민족사의 주인공이며,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가톨릭 세력에 맞서 싸워온 근대적인 개신교 주류 시민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1860년대에 태어난 이들 세대가 경험한 것은 퇴락한 아버지 세대의 영광이었다.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자들의 정당인 민족자유당은 이미 1880년대를 전후해서 비스마르크로부터 버림을 받았으며, 이후 계속된 자체 분열을 통해 이들이 30대 청년기가 되었을 때인 1890년대에는 늙은 명사들의 무기력한 클럽이 되어 있었다. 이 “포스트-자유주의의 시대”15)를 살아야 했던 베버와 좀바르트는, 무엇보다 사회 개혁과 사회 정책 활동에서 이제는 더 이상 영웅이 아닌 아버지 세대의 자부심을 회복할 수 있는 새로운 탈출구를 찾으려 했다.16)


좀바르트와 베버는 역사주의 학파의 문하에서 국민경제학을 공부했으며, 구스타프 슈몰러(Gustav Schmoller)17) 등 이른바 ‘강단사회주의자’들이 주축이 된 사회정책협회(Verein für Sozialpolitik)의 회원으로서, 또한 1904년에는 『사회과학 및 사회 정책지(Archiv für Sozialwissenschaft und Sozialpolitik)』의 공동 편집인으로서 활동했다. 이들은 노장파 강단사회주의자들의 가부장적 온정주의를 극복하려는 ‘근대주의적’ 소장파 사회 정책가의 대표 주자로서 빛나는 이력을 쌓아나갔다.18) 그러는 가운데 이들은 특히 개신교 사회회의에서 두각을 나타낸 같은 세대의 젊은 목사 나우만(Friedrich Naumann)과 괴레(Paul Göhre)의 ‘민족사회주의’운동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다. 이 운동은 혁명적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위협과 농업보수주의 세력의 지배로 특징지어지는 현실의 질곡을 깨고, 독일 민족의 사회적 통일을 통해 민족사의 도약을 이룬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면, 베버가 병으로 인해 교수직을 사직한 상태에서도 정기적으로 기부금을 낼 만큼 나우만의 운동에 초지일관 헌신적이었던19) 반면, 좀바르트는 점점 사회민주당 내의 온건파 사회주의자들에게 경도되었다는 점이다.20)


그런데 이런 사회운동가로서의 경력은 오히려 이들이 학계의 주류에서 국외자로 밀려나는 데 일조했다. 특히 좀바르트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좌파’로 낙인찍혀 향후 오랫동안 학계의 변방에 머물러야 했다. 베버는 1894년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교수직을 얻은 뒤 학자로서 순탄한 출발을 했지만, 나우만의 민족사회주의 서클 내에서 철저히 고립되었고, 이런 정치적 실패와 함께 찾아온 신경쇠약증으로 인해 교수로서의 활동도 사실상 끝나버렸다.21)


좀바르트와 베버의 ‘자본주의 정신’은 1900년대 초까지의 이러한 전기적 배경에서 발명되었다. 두 사람의 ‘자본주의 정신’ 개념이 갖는 의미의 유사성은 두 사람의 이력의 유사성과 무관하지 않다. 반면 향후 두 사람의 이력은 큰 차이가 난다.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자이자 사회 개혁적 성향을 지녔던 좀바르트는 이후 끊임없는 정치적ㆍ세계관적 편력을 보여준다. 그는 1900년경에는 온건파 마르크스주의자였지만, 제1차 세계대전 전야에는 이미 파시스트 이데올로기인 ‘반동적 근대주의’의 기수가 되어 있었으며, 나치 독일에서 ‘보수혁명’의 노쇠한 몽상가로서 마침내 생을 마감했다.22) 좌에서 우로의 이 극단적인 오디세이의 흔적은, 그가 학계의 주류에 편입하기 위해 눈물겹도록 끊임없이 써 내려간 방만한 저술들 속에 남아 있다. 반면 베버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사망할 때까지 1904/05년에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베버 역시 학계에서 소외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이 글을 불후의 명작으로 기획했다23)―을 쓸 당시의 문제의식과 관점을 끈질기게 고수했다. 두 사람의 ‘자본주의 정신’ 개념이 갖는 의미의 차이점 역시 이 개인사적 차이점과 무관하지 않다.24)


세가지 유형의 자본주의 정신

 

슈퇴커 : ‘근대적 유대인의 정신’

 

슈퇴커는 비록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새로운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이 용어에 담긴 개념을 가장 앞서 선취했다. 그는 자본주의적인 것의 특징을 묘사하면서 특정한 ‘정신’, 즉 특정한 문화적 동기부여와 문화적 정향성을 강조했고, 이 특정한 ‘정신’을 구현하고 있는 구체적 대상을 상징화함으로써 앞으로 살펴볼 좀바르트 및 베버와 동일한 방식으로 ‘자본주의 정신’을 개념화했다. 그러나 물론 슈퇴커의 ‘자본주의 정신’ 개념에 담긴 구체적인 의미 내용은 후자와는 다르다.


슈퇴커는 ‘자본주의’ 개념을 매우 부정적으로 썼다. 그는 “일방적인 돈의 경제”, “고삐 풀린 자본주의”25) 같은 표현을 쓰면서, ‘자본주의’를 “씨를 뿌리지 않고 수확하려는” 경제적 태도, 즉 투기ㆍ고리대금ㆍ지대수익 등 “고단한” 노동의 가치를 무시한 경제 생활 형태로 묘사한다.26) 그리고 이런 자본주의야말로 “우리 시대의 재앙”이라고 강조한다.27)


슈퇴커에 따르면, 이 부도덕한 자본주의는 “배금주의(물신숭배) 정신”에 의해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고 “배금주의 정신”의 구현자는 전통적 유대교 신앙에서 벗어나 “계몽주의 시대의 메마른 잔존물”에 뿌리 내리고 있는 세속화된 “근대적 유대인”이었다. 그는 때때로 “유대적 배금주의 정신”이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유대인과 “배금주의 정신”의 밀접한 관련성을 강조했다.28) 그런데 그는 ‘자본주의 정신’ 개념을 단순히 경제적 태도를 결정짓는 문화적 정향성을 묘사하는 것을 넘어서서, 계몽주의와 세속화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근대 문화 현상 전반을 부정적으로 지칭하는 데까지 확대시켰다. 그는 근대적 유대인들의 “구역질나는” 배금주의 정신은 “무신론”과 “유물론”적 세계관의 필연적 결과임을 강조한다.29) 또한 근대적 유대인들의 ‘배금주의 정신’과 그들의 “인간성”과 “전체 인류의 행복”이라는 인본주의적이고 현세 행복주의적인 이상은 동전의 양면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30)


이상과 같이 슈퇴커는 ‘자본주의 정신’을 ‘배금주의 정신’, 나아가 세속화와 계몽주의에 의해 발전된 물질주의적이고 행복지상주의적인 문화적 정향 및 태도 전반과 동일시한다. 그리고 이런 정신을 구현하는 ‘근대적 유대인’이라는 위협적 상징을 전면에 부각시키고 있다. 슈퇴커는 이런 개념의 조작을 통해 무엇보다 보수적 소시민층의 근대 산업사회에 대한 비관주의적 태도를 극대화시키는 공포극을 연출했다.


예를 들어 정치적 반유대주의운동의 횃불을 당긴 것으로 유명한 1879년 베를린 기독교사회노동자당 집회에서 행해진 ‘근대적 유대인에 대한 우리의 요구’31)라는 강연을 보자. 700여 명에 달한 강연의 청중들은 대부분 산업화 과정의 수혜자라기보다는 피해자인 자영업자, 수공업자 등 전통적 ‘중간신분’과 일부 노동자들로 구성되었으리라 강하게 추측된다. 이후 수년간 이 강연은 기독사회노동자당의 선전 팸플릿으로 여러 차례 인쇄되어 베를린 지역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수공업자, 노동자, 중소 농민, 보수적 기독교도들, 나아가 반유대주의 정당의 지지자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32)


슈퇴커는 이 강연에서 독일의 현재를 비극적 상황으로 묘사했다. “독일의 종말이 왔다”, “독일 정신은 죽음에 이르렀다”, 사회적으로 병든 “민족의 몸”, “몰락의 시대”, “피할 수 없는 파국” 등 비장한 표현들이 반복되었다. 더 나아가 그는 “유대 정신”의 “지배”에 의한 독일 민족의 문화적이고 경제적인 빈곤화, 혹은 독일 정신의 “유대화” 등 위협적 표현을 통해 근대 산업사회에 대한 공포와 적개심마저 불러일으켰다.33)


이와 함께 슈퇴커는 문화적으로 반종교적인 “근대적 유대인”이 구현하고 있는 ‘자본주의 정신’을 “셈족의 정신” 내지 “낯선 정신”으로, 반면 독일인이 대변하는 정신을 “기독교적이고 게르만적”인 정신으로, 혹은 배금주의적 탐욕이 아닌 “이상주의적인 정신”으로 대립시키면서, 또한 사회경제적으로 “전체적인 독일 노동” 대 “유대 자본의 힘”, “유대 재산” 대 “기독교 노동”의 대립을 강조하면서, 산업자본주의 발전에 적대적인 보수주의적 소시민들의 민족적 자부심을 인종적이고 윤리적인 관점에서 고취시킨다.


동시에 그는 이를 통해 정치적인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을 “유대 정신”의 대변자로 몰아가면서, 보수주의 진영과 자유주의 및 사회주의 진영의 대립을 양극화시키고 있다.34) 슈퇴커에게 자유주의는 경제적으로 화폐자본과 맨체스터주의, 문화적으로 반기독교적인 세속 문화의 대변자이다. 한편 사회주의는 폭력적 혁명주의와 무신론의 담지자이며, 조국을 위험에 빠트리고 있다. 그리고 양자는 내적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 자유주의는 앞서 말한 속성으로 인해 사회주의의 확산과 성장을 증진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민주당은 궁핍과 시대정신의 자식이다. 도덕적 야만과 종교적 몰락, 경제적 부정의와 빈곤으로부터 태어났다.”35)


1890년대가 되면 슈퇴커는 “근대적 유대인”에 의해 구현된 ‘자본주의 정신’이 필연적으로 가져올 총체적 파국의 위험을 곧 닥칠 사회주의 혁명에서 찾았다. 그의 정치공포극은 1891년의 현실진단에서 절정에 달한다.

많은 동시대인들은 (…) 우리가 도망칠 수 없는 파국 앞에 서 있다는 확신을 갖고 산다. 근심하지 않는 자는 아무도 없다.36)

 

이상과 같이 슈퇴커의 ‘자본주의 정신’ 개념은 비관주의적 시대진단, 반유대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이며 반자유주의적이고 반사회주의적인 정치적 함의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그에게 ‘자본주의 정신’은 근대적 ‘시대정신’ 전반과 그 정치ㆍ사회적 위험을 강조하기 위한 키워드였다. 그러나 슈퇴커는 동시에 이 개념을 통해, ‘근대적 유대인’의 무신론적이고 물질주의적인 ‘낯선 정신’이 주도하는 공포스러운 근대를 대체할 ‘종교적 창의력’과 ‘정신적 도약’, 그리고 사회윤리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대안적 근대’를 향한 열망도 간접적으로나마 표현하고 있었다.


막스 베버 : ‘세속적 금욕주의’

 

청년 막스 베버의 정치의식은 이른바 ‘자유주의의 후계자’ 의식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그는 한때 독일 민족국가의 정신적 주인이었던 아버지 세대의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자들이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으려 했다. 그 수단은 내적으로 민족의 사회적 통일과 외적으로 제국주의적 발전을 통해 독일제국을 강력한 민족국가로서 새롭게 재건하는 것이었다.37) 또한 그는 사회적으로 철저한 ‘부르주아지’ 계급의식의 소유자였으며,38) 동시에 슈퇴커가 “최소한의 의미에서라도 그는 복음주의적인가? 그는 교회 공동체 생활에 참여하는가?”39)라고 의심한 바와 같이, 비록 내적으로는 교회를 떠난 불가지론자(Agnostiker)였지만, 슈퇴커 못지않게 개신교도로서의 자부심도 갖고 있었다.40)


그의 비관주의는, 독일 통일을 이룬 주인공이자 독일 산업화와 정치적ㆍ문화적 진보의 견인차였던 독일 개신교 부르주아지가 자아를 상실하고 역사적 지위를 타자에게 이양한 채 그동안의 성과에 자족하는 속물들로 변질되고 말았다는 데서 나왔다. 그의 ‘자본주의 정신’ 개념은 직접적으로 이런 문제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베버에게 ‘근대적 자본주의 정신’은 근대 문화를 대표한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41)에서, 베버는 먼저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의 설교를 화두로 삼아 ‘자본주의 정신’에 담긴 이중적 의미를 대비시킨다. 프랭클린에 의하면, 시간은 돈이고, 신용 역시 돈이며, 돈은 번식력이 있고 결실을 맺는다. 따라서 그는 근면ㆍ검소ㆍ정확ㆍ공정함이 젊은이의 출세를 위해 “유용”하다고 충고한다.42) 베버는 프랭클린의 설교가 그의 동시대인들 다수에게 불러일으킨 반향을 근거로, ‘자본주의 정신’, 즉 특별히 자본주의적인 ‘에토스’ 혹은 ‘윤리’43)가 일반적으로 배금주의적인 탐욕의 철학, 혹은 공리주의적이고 행복추구적인 생활윤리와 동일시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베버는 프랭클린의 설교 속에는 동시에 행복주의와 쾌락주의를 초월한 윤리, 즉 개인의 행복과 유용성을 넘어서서 돈벌이 그 자체가 최고의 목적임을 강조하는―따라서 공리주의자들이 보기에 ‘비합리적’인44)―윤리가 숨어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자본주의 정신’을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에서 기원한 “세속적 금욕주의”로 정의한다.


다시 말해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을 특히 칼뱅주의에서 유래한 잉글랜드의 퓨리타니즘(청교도주의)이 강조한 ‘금욕주의’적 직업 관념(직업윤리),45) 그리고 이에 기초한 합리적인 생활 방식과 동일시함으로써 계산된 배금주의, 향락적 공리주의의 속물근성과 정반대되는 ‘세속적 금욕주의’, 혹은 ‘금욕주의적 합리주의’라는 하나의 문화적 태도로 정의하고 있다. 이에 덧붙여, 그는 후자는 과거에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진 에토스이고, 전자는 현재에 우세한 에토스임을 강조한다.46) 이렇게 서로 시기적으로 상반되는 두 가지 의미를 축으로, 그는 아래와 같이 하나의 비극적인 대서사를 구성한다.


서구의 개신교 시민계급은 오늘날 “근대적 삶에서 가장 강력한 힘인”47) 자본주의를 탄생시킨 근대적 주체이다. 이제 모든 인류의 생활 방식을 규정하는 “근대적 경제 질서라는 우주”를 탄생시킨 세계사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근대적 주체는 ‘세속적 금욕주의’에 기반을 둔 자아를 잃어버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금욕주의적 직업윤리는 기계화되고 관료화되었다. “승리하는 자본주의”는 자신의 “기계적 토대” 위에서 “고도의 정신적 문화 가치”를 집어던졌다. 이제 근대적 주체는 자신이 만들어낸 제도화된 합리성, 즉 관료주의적 메커니즘의 “단단한 강철 구조물(stahlhartes Gehäuse)” 속에 감금되고 말았다. 이렇게 자아를 상실한 근대적 주체의 문화적 태도는 배금주의 및 물질주의, 유대인의 “천민자본주의적”48) 에토스, 경쟁의 열정에 입각한 스포츠적 성격의 영리 추구, 공리주의 같은 무목적적이고 비윤리적인 공허한 ‘자본주의 정신’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만약 “새로운 예언자가 출현하지 않거나, 옛 생각과 이상의 부활이 없다면”, 이제 근대 문화의 “단단한 강철 구조물”은 마침내 “중국식으로 화석화”될 것이고, 근대적 주체는 그 속에서 “인류가 유래 없는 단계에 올라섰다고 자만하는 정신없는 전문가, 가슴 없는 향락자”로 전락할 것이다.49)


이처럼 베버의 ‘자본주의 정신’ 개념은 비관주의적인 근대문명 비판의 상징으로서 기능한다.50) 동시에 그의 ‘자본주의 정신’ 개념은 매우 강한 정치적 함의도 담고 있다. 베버는 특히 독일의 개신교 시민계급이 자아를 인식한 근대적 주체로 거듭날 수 있는가를 진단한다. 이를 위해 그는 한편으로 가톨릭교도와 개신교도를 비교한다. 여기서 그는 비록 당시 가톨릭이 농업적 보수 세력과 연대하여 정권에 참여하고는 있지만, 금욕적이고 합리적인 에토스가 결여된 가톨릭교도는 결코 근대적 주체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하면서, 이제 세계사의 주역이 되기 위해 제국주의 세력으로 발돋움을 시작한 독일 민족의 앞날은 오로지 개신교 시민계급의 손에 달려 있음을 은근히 강조한다.51)


하지만 다른 한편 독일의 개신교 시민계급에 대한 자기비판도 노골적이다. 베버는 신의 섭리에 순응할 것을 강조함으로써, 삶의 방법적 합리화를 위한 심리적 동인을 결여한 가톨릭에 가까운 루터의 가르침은 결코 근대적 직업윤리를 낳지 못했음을 지적한다.52) 이를 통해 그는 당시 독일 개신교의 주류로서 루터교의 정통 신학을 신봉하고, 정치적으로 농업 보수주의 진영에 속했던 보수주의자들을 공격하고 있다.53) 반면 베버는 당시 제1의 산업제국이었던 앵글로-색슨 세계의 종교적ㆍ윤리적 기반이 된 칼뱅주의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독일 개신교의 개혁을 촉구하고 있다.54) 미래의 독일 개신교가 독일 민족국가를 위해 ‘금욕적 합리주의’라는 근대적 윤리를 설파하는 시민종교로 거듭날 것을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베버의 ‘자본주의 정신’ 개념은 비주류로 밀린 민족주의적이고 종파주의적인 독일 자유주의자들의 정치ㆍ사회 비판 담론과 보편적인 근대문명 비판 담론을 통합시키는 매개 고리 역할을 했다. 이를 통해 자아를 상실한 독일 개신교 부르주아지에게 한편으로는 민족의 지도계급으로서의 사명, 즉 ‘금욕적 합리주의’에 입각한 인격체(Persönlichkeit)로 발전해 대중민주주의 시대의 새로운 문화적 에토스를 지도하는 독일 민족의 예언자로서의 소명을 각성시키려는 베버의 염원이 표현되고 있다.


하지만 베버의 ‘자본주의 정신’ 개념은 역설적이게도 영미 세계 민족주의의 보편사적이고 시민종교적인 자기정당화에 기여했다. 특히 미국의 퓨리타니즘 신화와 냉전 시대 아메리카니즘의 자기정당화는 베버의 ‘자본주의 정신’ 개념에 힘입은 바가 크다.55)


좀바르트 : ‘영웅 정신’과 ‘상인 정신’

 

세계관적 편력의 종점이 결국 ‘반동적 근대주의’로 끝난 좀바르트는 베버와 마찬가지로 우선 정치적 투쟁 개념이었던 ‘자본주의’를 학술 개념으로 전화시키면서, 영리 추구와 함께 합리성을 자본주의의 원리로서 파악한다. 또한 자본주의를 특정 시기에 특정한 곳, 즉 근대 초 유럽에서 처음으로 출현해 여타의 모든 낡은 경제 형태들과 투쟁하여 승리한, 인류 보편사의 한 발전 단계를 지배하는 경제 시스템으로 파악한다.56) 그는 베버를 인용하여 오늘날 “자본주의적 경제 조직”은 “실제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구조물”, “거대한 우주”가 되어버렸다고 표현하면서, 자본주의를 근대인이 받아들여야 할 숙명으로 묘사한다.57) 이런 ‘자본주의’ 개념 속에는 역사의 보편사적인 진보는 피할 수 없는 법칙이라는 신념이 잘 배어 있다. 그런 맥락에서 그는 ‘자본주의’ 개념을 보수주의자들의 ‘산업주의’ 비판과 전통적 수공업 보호책에 대항하는 투쟁 개념으로 사용하기도 했다.58)


좀바르트는 베버와 마찬가지로 근대 자본주의의 시작과 발전에 ‘정신’이 있었음을 강조함으로써, 근대 경제사와 근대 문화사를 통합시킨 전체 근대사라는 보편사적 메타서사를 구상했다. 그는 이를 통해 보편적 자연사에 입각한 마르크스의 『자본 l』을 뛰어넘는 대작을 기획했다. 물론 좀바르트는 베버와는 달리 ‘자본주의 정신’을 근대적 정신 일반과 동일시한다. 그는 죽은 헤겔이 부활한 양 장중하게 말한다.

유럽적 영혼의 깊은 근저로부터 자본주의가 자라났다. 새로운 국가와 새로운 종교, 새로운 과학과 새로운 기술을 탄생시킨 바로 그 정신이 또한 새로운 경제생활을 창조했다.59)

 

따라서 좀바르트의 ‘자본주의 정신’ 개념은 매우 다양한 기원을 갖는 여러 요소들의 복잡한 구성물로 이루어져 있다. 다시 말해 이윤 추구의 본능 같은 생물학적 토대에서부터, 철학 및 종교와 같은 여러 윤리적 힘들, 그리고 심지어는 기술 및 “자본주의 자체”로부터 유래했고, 복잡한 과정을 통해 발전한 문화적 정향성 및 태도들의 복합체이다. 이렇게 매우 복잡한 좀바르트의 ‘자본주의 정신’ 개념은 기본적으로 근대 (정신)문화,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 시대의 정신” 혹은 “우리 시대의 영혼의 구조” 일반의 역사적 대 파노라마를 묘사하고 또한 문제점을 진단하기 위한 키워드로서 기능한다.60)


물론 좀바르트는 단지 ‘자본주의 정신’이 복잡한 구성물임을 보여주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근대문화에 대한 비판적 현실 진단과 미래 예측을 위해 ‘자본주의 정신’을 아래에서 보듯이 몇 가지 하위 개념들로 나누고, 그것을 구현하는 역사적 주체들을 명료화한다. 이를 통해 베버와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하나의 ‘역사 비극’을 재구성한다. 그러나 여러 ‘자본주의 정신들’이 구성하는 좀바르트의 ‘역사 비극’은 베버의 그것만큼 효과적이지 못하다.


우선 1902년 『근대 자본주의』에서 좀바르트는 본격적인 비극 대신 차가운 다큐멘터리를 의도했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서는 이것이 갑자기 비극으로 바뀐다. 그의 비극에는 때때로 너무 많은 주인공이 등장해 서로 이름을 바꾸기도 하고, 때로는 표변하기도 하며, 낭만주의적 분위기로 과장되게 외치기도 하고, 나아가 이미 퇴장한 자가 갑자기 주인공으로 다시 무대에 오르기도 한다. 예를 들어 『근대 자본주의』의 개작을 위해 쓴 『사치와 자본주의』(1912)에서는 영웅적 사업가와 합리적 상인이 갑자기 궁정귀족, “귀여운 여자”로 불린 고급 창녀 및 애첩들, 그리고 귀부인들의 소비를 부추기는 졸부들로 희화화된다. 그리고 이들이 주인공이 된 멜로드라마 속에서 쾌락주의와 사치 풍속에 기초한 감각적 소비문화가 자본주의 발전의 원동력으로 묘사된다. 또한 그가 초기에는 퇴출시켰던 수공업자와 농민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갑자기 농촌 낭만주의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다시 등장하기도 한다.61) 따라서 그의 역사 비극은 노이로제 환자가 연출한 관객을 정신없게 만드는 ‘블랙코미디’라고 할 수 있다.


좀바르트가 구성하는 역사 비극의 큰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초기 자본주의’ 시대는 역동적이고 창조적이었다. 이 시대에는 권력에의 의지와 역동성으로부터 탄생한 영웅적 “사업 정신”, 그리고 다른 한편 질서와 “수학적 정확성”, “차가운 합목적성”, 즉 경제적 합리성과 종교적ㆍ윤리적 덕목이 결합되어 등장한 “시민정신”, 이 두 종류의 ‘자본주의 정신’이 조화를 이루며 경제생활을 지배했다.62) 이 두 종류의 자본주의 정신을 함께 구현한 여러 근대적 경제인들, 즉 1913년 좀바르트가 ‘부르주아지’라고 명명한 이들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 발전시켜나갔다.


그러나 우리의 시대, 즉 “고도자본주의 시대”는 영웅적인 “사업 정신”과 “경제적 합리성”이 “관료주의적 거대 경영” 속에서 기계화되어버린 시대이다. 관료적 근대성이 지배하는 “움직일 수 없는 단단한 구조물”로 이루어진 세계 속에서 “자본주의 정신”은 더 이상 활동 공간이 없다. “초기 자본주의 시대에는 사업가가 자본주의를 만들었다. 그러나 고도자본주의 시대에는 자본주의가 사업가를 만들고 있다.”63) 우리의 시대는 결국 “눈먼 거인이 민주주의적인 문화의 수레를 끌려고 채비하는” 위험한 사태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64)


이처럼 좀바르트는 베버와 마찬가지로 근대적 문명을 창조한 주체가 자신의 결과물에서 소외되었음을 강조한다. 그런데 베버와 달리 좀바르트는 그 근본 원인으로서 근대적 주체의 자아 상실 대신 자아 분열과 변질을 강조한다. 그는 근대적 주체를 특징짓는 두 가지 ‘자본주의 정신’ 중 “사업 정신”은 소수의 “영웅적”인 것과 제도의 틀 안에서 기계화된 “대중적”인 것으로 분열되었고, “시민정신”은 자연과학과 근대기술을 탄생시킨 “게르만-로마적 정신”과 상인적 “유대 정신”으로 분열되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 분열의 결과는 전반적인 “영웅 정신”의 소멸과 “시민정신”의 탈종교화와 탈윤리화, 마침내 ‘자본주의 정신’ 일반의 “상인 정신”으로의 변질이다. 이것이 창조적이었던 “초기 자본주의”에서 물화된 “고도자본주의” 단계로의 이행 과정이다.65)
좀바르트는 ‘상인 정신’의 특징을 때로는 차가운 경제적 합리성에서 찾기도 하고, 때로는 합목적적인 배금주의 및 물질주의에서 찾기도 한다. 나아가 양자를 싸잡아 ‘배금주의의 수학’으로서 부정적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즉 ‘상인 정신’은 경제와 기술, 안락함과 스포츠로 표현된 소상인의 영업 정신, 실용주의적이고 공리주의적인 물질주의, 이기주의적 개인주의, 유용성과 행복과 향락의 생활 철학, 나아가 국제주의와 문명화의 사명으로 위장된 상업적 팽창주의 및 자본주의적 세계 정복의 야욕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대표적으로 구현한 주체를 때로는 유대인에게서, 때로는 영국이 대표하는 ‘서구 문명’에서 찾기도 한다.66) 이런 맥락에서 그는 영미 세계의 퓨리타니즘 정신과 유대 정신을 동일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67)


반면 그는 원래의 ‘자본주의 정신’에 깃들었던 진정한 창조적 의미를 “영웅 정신”에서 찾는다. 그리고 “영웅 정신”의 구현자를 때로는 1902년 당시에는 소멸될 것으로 예견한 “정신과 영혼”의 담지자인 수공업자와 농민에게서,68) 때로는 “상업주의의 더러운 홍수에 맞서는 마지막 댐”인 독일 민족에게서 찾는다.69) “영웅 정신”은 개별 인간 주체의 인격성(Persönlichkeit), 예술ㆍ철학 같은 정신문화, 희생정신, 진실됨, 경건함, 용기, 명예에 대한 경외심 같은 덕목들, 나아가 영원성과 종교에 대한 자각 위에서 형성된다.70) 그리고 “영웅 정신”의 구현자인 수공업자와 농민을 정신적 축으로 한 독일 민족만이 지금까지 진행된 역사 법칙의 반전을 가능케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좀바르트의 ‘자본주의 정신’ 개념은 수세에 몰린 자유주의자들과 문화비관주의적이고 보수적인 교양시민들의 잡다한 신경질적 근대 비판 담론들을 통합시켜주는 매개 고리 역할을 했다. 정치적으로 그의 ‘자본주의 정신’ 개념은 반유대주의와 반영 감정 및 반국제주의를 고취시키면서 독일 민족을 정치사회적으로 통합하려 한 급진민족주의의 표어로 기능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좀바르트의 ‘자본주의 정신’ 개념은 당시 독일 부르주아지의 근대화 과정에 대한 고통스러운 경험, 그로 인한 노이로제적 위기의식, 그리고 역사의 종말론적 반전에 대한 갈망을 잘 표현해주는 지표라는 점에서 핵심적 의의를 지닌다.71)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1900년을 전후하여 탄생한 ‘자본주의 정신’ 개념 속에는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주류에서 소외되고 위기에 처한 독일 부르주아 근대주의자들의 잡다한 비관주의적 시대 진단과 근대문명 비판이 담겨 있었다. 그들은 이 개념을 통해 무엇보다도 근대 산업사회의 정신적 측면, 즉 물질주의적인 세계관과 문화가 갖는 취약점을 비판하고, 부분적으로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려 했다. 물론 그들의 문명 비판은 현실적인 수세를 극복하고 새롭게 정치ㆍ사회ㆍ문화적인 헤게모니를 잡으려는 열망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중 보수주의적 근대주의자들을 대표하는 슈퇴커는 ‘자본주의 정신’ 개념에 강한 반유대주의적 함의를 부여한 채, 이를 무엇보다 정치공포극을 구성하는 중심적 개념으로 사용했다. 이를 통해 슈퇴커는 ‘유대인이 대변하는 배금주의(물신숭배)적 근대문명’ 전반에 대한 보수적 소시민 대중의 위기의식을 정치화시키려 했다.
반면 자유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근대주의자들을 대표하는 베버와 좀바르트의 ‘자본주의 정신’ 개념은, 독일 부르주아 자유주의자 내지 민족주의자들의 정치적 위기의식을 보편사에 입각한 문명 비판의 맥락 속으로 전환시키는 매개 고리 역할을 했다. 여기서 ‘자본주의 정신’은 상호 대립되는 이중적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 현재의 ‘부도덕한’ 에토스이고, 다른 한편 과거의 ‘이상적’ 에토스이다. 그럼에도 양자 간에는 가치 중립적 의미에서 ‘합리성’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 ‘자본주의 정신’은 독일 부르주아지를 문명사적 관점에서 근대적 주체로, 또한 이 계급의 정치ㆍ사회적 위기 상황을 근대적 주체의 위기 상황으로 일반화시키는 대서사극의 중심적 개념으로 기능했다. 그런데 베버가 ‘자본주의 정신’ 개념을 통해 근대적 주체의 자아 상실을 주제로 한 심각한 역사 비극을 구성했다면, 좀바르트는 원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그 스스로 자아 분열과 변질을 거듭하면서 근대적 주체의 자아 분열과 변질을 주제로 한 블랙코미디를 만들어냈다.


이처럼 ‘자본주의 정신’은 한편으로 공포극의 플롯을 지닌 정치ㆍ사회 비판 담론, 다른 한편으로 비극과 블랙코미디의 플롯을 지닌 보편적 문명 비판 담론을 조직하고 응집성을 부여하면서, 세기 전환기의 독일 부르주아 근대주의자들의 근대 산업사회에 대한 순응의 태도가 결코 진보낙관주의 때문이 아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끝으로 이 세 가지 유형의 ‘자본주의 정신’은 모두 강한 민족주의적 함의를 담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물론 각자 강조점의 차이는 있지만, 세 가지 유형의 ‘자본주의 정신’은 모두 당시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담론에서 독일 민족국가의 3대 적으로 표상되었던 사회주의자의 “붉은 인터내셔널”, 가톨릭의 “검은 인터내셔널”, 그리고 유대인의 “황색 인터내셔널”, 더 나아가 “인터내셔널” 전반에 대한 편견과 적개심을 강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렇다면 이 ‘자본주의 정신’은 어떤 과정을 거쳐 긍정적 함의를 지닌 채 근대화 이데올로기로 쓰이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정신’ 개념으로 변화되었을까? 이 개념의 통시적 변화 과정을 살피기 위해서는 베버의 ‘자본주의 정신’ 개념이 미국에 수용되어 퓨리타니즘(청교도) 신화와 결합되는 과정, 냉전 시대에 들어 미국에서 근대화론이 출현ㆍ발전하고 아메리카니즘의 자기정당화가 진행되는 과정, 이후 근대화론 및 아메리카니즘 모델이 동아시아에서 수용되고 변형되는 과정 등이 연구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비로소 ‘자본주의 정신’의 전체 개념사가 서술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각 단계마다 지금까지 상술한 방식과 같은 개념의 사회사 연구가 진행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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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컨대 마이클 노박, The Spirit of Democratic Capitalism(이화수 옮김, 『민주자본주의 정신』, 인간사랑, 1990); 루드비히 폰 미제스, Economic Policy/The Anti-Capitalistic Mentality(김진현 옮김, 『자본주의 정신과 반자본주의 심리』, 한국경제연구원, 1995); 야마모토 시치헤이, 『일본 자본주의 정신』(김승일/이근원 옮김, 범우사, 1998; 양창삼, 「공맹 사상과 유교자본주의」, 『경영사학」 20, 1999, 19~47쪽; 함재봉, 『유교 자본주의 민주주의』, 전통과 현대, 2000; 박우희, 『한국 자본주의의 정신』, 박영사, 2001.
2) Harry Ritter, “Capitalism”, idem, Dictionary of Concepts in History, New York et al., 1986, pp. 25~31; M.-E. Hilger, “Kapital(VI. Kapitalismus)”, GGB, 1982, pp. 442~454.
3) Inho Na, Sozialreform oder Revolution. Gesellschaftspolitische Zukunftsvorstellungen im Naumann-Kreis 1890~1903/1904, Marburg, 2003, pp. 116~119.
4) Harry Ritter. “Capitalism”, M.-E. Hilger, “Kapital(VI. Kapitalismus)” 참조.
5) Cf. Berhard vom Brocke, ed., Sombarts ‘Moderner Kapitalismus’, München, 1987, pp. 42f., 84f.
6) 1870년대 이후 독일 사회를 양분시킨 미래국가 논쟁에 대해서 Lucian Hölscher, Weltgericht oder Revolution. Protestantische und sozialistische Zukunftsvorstellungen im deutschen Kaiserreich, Stuttgart, 1989, pp. 378~435.
7) Lucian Hölscher, “Industrie (IX)”, GGB 3, 1982, pp. 289ff. 참조.
8) “농업 국가냐 산업 국가냐” 논쟁에 대해서는 Kenneth D. Barkin, The Controversy over German Industrialization 1890~1902, Chicago/London, 1970 참조.
9)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프릿츠 링어(Fritz Ringer)에 의하면 ‘근대주의자’는 근대화를 숙명으로 여기고 근대에 순응하려는 사람들이다.
10) 이런 점들로 인해 슈퇴커의 전기를 쓴 나치 역사가 프랑크(Walter Frank)는 슈퇴커를 히틀러의 선구자로 묘사했다. Walter Frank, Hofprediger Adolf Stoecker und die chrislichsoziale Bewegung, 2. Aufl., Hamburg, 1935. 선동 정치의 근대적 의미에 대해서는 David Blackbourn, “The Politics of Demagogy in Imperial Germany”, Past&Present 113, 1986, pp. 152ff. 참조.
11) 슈퇴거에 대한 근래의 평가는 Günther Brakelmannet al., Protestantismus und Politik. Werk und Wirkung Adolf Stoeckers, Hamburg, 1982; 슈퇴커 운동의 정치사적 의의는 Thomas Nipperdey, Deutsche Geschichte 1866~1918, Bd. II, München, 1992, pp. 333~337 참조; 슈퇴커에 대한 상세한 전기는 그의 정치적 동지였던 D. Oertzen이 쓴 Adolf Stöcker. Lebensbild und Zeitgeschichte, 2 Bde, Berlin, 1910를 볼 것.
12) 슈퇴커는 원래 개신교 사회회의를 사회개혁을 기치로 사회민주당에 대항하는 대중 정당으로서 계획했다. 그러나 그의 의도와는 다르게 이 기구는 곧 자유주의자들까지 참여하는 부르주아지 사회개혁운동의 학술 토론장으로 변화되었다. 슈퇴커의 의도에 대해서는 P. Göhre, Die evangelisch-soziale Bewegung, Leipzig, 1986,p. 145. 개신교 사회회의에 대한 근래의 전반적인 재평가는 E. I. Kouri, Der Deutsche Protestantismus und die Soziale Frage 1870~1919. Zur Sozialpolitik im BildungsBürgertum, Berlin, 1984 참조.
13) 좀바르트의 전기에 대해 자세한 내용은 Friedrich Langer, Werner Sombart, 1863~1941. Eine Biographie, München, 1994 참조.
14) 베버의 전기에 대해 자세한 내용은 Marianne Weber, Max Weber. Ein Lebensbild, Tübingen, 1984 참조. 특히 베버의 정치적 발전 과정에 대해서는 Wolfgang J. Mommsen, Max Weber und die deutsche Politik, 1890~1920, 2. Aufl., Tübingen, 1974 참조.
15) James J. Sheehan, “Deutscher Liberalismus im postliberalen Zeitalter 1890~1914”, Geschichte und Gesellschaft 4, 1978, pp. 29ff.
16) Cf. Authur Mitzman, “Persönlichkeitskonflikt und Weltanschauliche Alternativen bei Werner Sombart und Max Weber”, W. J. Mommsen/W. Schwentker eds., Max Weber und seine Zeitgenossen, Göttingen, 1988, pp. 137~146.
17) 슈몰러는 좀바르트의 박사학위 지도교수였다.
18) Dieter Krger, Nationalökonomen in wilhelminischen Deutschland, Göttingen, 1983 참조.
19) 이에 대해 Max Maurenbrecher, “Klarstellung”, Die Hilfe 9/33, 1903, pp. 4f.
20) 좀바르트의 나우만-괴레운동에 대한 기대는 그의 『Sozialismus und soziale Bewegung im 19. Jahrhundert』(Jena, 1896) 마지막 장에 잘 나타나 있다. 사회민주당 내 베른슈타인 등 이른바 수정주의자들에 대한 호감은 “Mein Leben und Werk”(1933), Berhardv. Brocke ed., Sombarts ‘Moderner Kapitalismus’, pp. 428~434 참조.
21) 베버가 나우만의 민족사회협회 내에서 행한 급진 민족주의적 계몽 작업이 실패로 끝났음은, 베버가 농업이민 노동자 문제와 관련해 행한 “폴란드인은 짐승”이라는 발언과 이에 이은 격한 반론들(Protokoll über die Vertreter-Versammlung aller National-Sozialen in Erfurt vom 23. bis 25. Nov. 1896, pp.47ff.), 그리고 조옴(Sohm)이 나우만에게 보낸 1896년 11월 24일자 편지(Nachlass Naumann Nr. 131, BA Postdam, Bl. 26ff.)에서 “막스 베버는 유감스럽게도 전혀 다른 관점에 서 있는 것 같소. 그는 이 점을 제외하고는 뭔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인데 말이요”라는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 또한 극도의 신경쇠약으로 인해 교수직을 사직했을 때 베버 부부의 참담한 심정에 대해서는 Marianne Weber, Max Weber, pp.276f.
22) Jeffrey Herf, Reactionary Modernism. Technology, Culture, and Politics in Weimar and the Third Reich, Cambridge, 1984, pp. 130~151; Rolf P. Sieferle, Die Konservative Revolution. Fnf biographische Skizzen, Frankfurt a.M., 1995, pp. 74~105.
23) Hartmut Lehmann, Max Webers ‘Protestantische Ethik’, Göttingen, 1996, p. 95 참조.
24) 베버는 “내 논문 중 본질적으로 사실적인 주장을 담고 있는 단 하나의 문장도 지우거나, 변형시키거나 약화시키거나, (…)다른 것을 부연하지 않았다”라고 1920년의 제2판에서 강조하고 있다. Max Weber, 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이하 PE로 약함) ed., by K. Lichtblau/J. Weiß, Bodenheim, 1993, p. 158.
25) Aolf Stöcker, Christlich-Sozial. Reden und Aufstze, 2 Aufl., Berlin, 1890, p. 379.
26) Ibid., p. 368.
27) Ibid., p. 379.
28) Ibid., p. 360.
29) Ibid., p. 364.
30) Ibid., p. 365.
31) Christlich-Sozial, pp. 359~369에 재수록 됨.
32) M. Imhof, “Einen besseren als Stöcker finden wir nicht”. diskursananalytische Studien zur christlich-sozialen Agitation im deutschen Kaiserreich, Oldenburg, 1996, pp. 48ff., 61ff.와 비교할 것.
33) Christlich-Sozial, pp. 359~369.
34) Ibid.
35) Christlich-Sozial, pp.6ff., 22ff., 194ff. 인용은 Reden und Aufstze. Mit einer biographischen Einleitung ed., by R. Seeberg, Leipzig, 1913, p. 216.
36) Adolf Stöcker, Sozialdemokratie und Sozialmonarchie, Leipzig, 1891, pp. 4f.
37) Wolfgang Mommsen, Max Weber und die deutsche Politik, pp. 1~96과 비교할 것. 베버는 특별히 역사가 트라이취케(Treitschke)의 급진적 민족주의에 영향을 받았다.
38) Protokoll ber die Vertreter-Versammlung aller National-Sozialen(1896), pp. 47ff. 참조.
39) 슈퇴커가 나우만에게 보낸 편지(1895. 6. 8), Th. Heuss, Friedrich Naumann. Der Mann, das Werke, die Zeit, 2 Aufl, Stuttgart/Tübingen, 1949, p. 531에서 재인용.
40) Thomas Nipperdey, “Religion und Gesellschaft: Deutschland um 1900”, Historische Zeitschrift 246, 1988, pp. 591~613 중 p. 613. 베버는 종교적으로 특히 어머니의 독실한 칼뱅주의적 신앙의 영향을 받아 금욕적 에토스 속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베버 가족의 종교적 분위기는 전통적 교리로부터 자유로운 문화프로테스탄티즘에 의해 각인된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Marianne Weber, Max Weber, pp. 107~111 참조.
41) 원래 Archiv für Sozialwissenschaft und Sozialpolitik 20, 21권(1904/1905)에 실린 논문이었는데, 1920년 『종교사회학 총서』에 확대된 형태로 수정 재수록되었다. 양 판본의 비교는 앞서 인용한 M. Weber, 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 ed., by K. Lichtblau/J. Weiß)를 볼 것. 베버의 이 저작은 오늘날까지 논쟁에 논쟁을 거듭하고 있다. 이 저작에 대한 비판과 그에 대한 베버의 대응은 Johannes Winckelmann ed., Max Weber. Die protestantische Ethik II. Kritiken und Antikritiken, 4 Aufl, Gtersloh, 1982.
42) PE, pp. 12ff.
43) 베버는 ‘윤리’와 ‘에토스’를 거의 동의어로 쓴다. 실례로 1904/1905년판에서 그가 즐겨 쓴 ‘윤리’라는 용어는 1920년판에서는 많은 곳에서 ‘에토스’로 대체된다. PE, p. XV 참조.
44) PE 15, p. 162 참조.
45) 제1판의 “직업관념(Berufsidee)”이 2판에서는 “직업개념(Berufskonzeption)” 내지 “직업윤리(Berufsethik)”로 대체된다.
46) 베버는 결론 부분에서 ‘자본주의 정신’ 개념의 이런 의미상의 변화를 강조하기 위해 프랭클린의 설교를 다시 한 번 인용한다. PE, pp. 152f.
47) 1920년판을 텍스트로 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박성수 옮김, 제2판, 문예출판사 1998)의 저자서문(8쪽). Lichtblau/Weiß가 편집한 책에는 1920년판의 서문이 빠져 있다.
48) 베버는 특히 좀바르트를 의식해서근대 유대인의 자본주의를 정치 및 투기와 결합된 모험가적 ‘천민자본주의’로 규정하면서, 합리적 경영과 노동의 합리적 조직화에 기반을 둔 퓨리탄의 자본주의와 대비시킨다(PE, p. XXII. 1920년 판에 첨가된 내용을 위한 주석 48, 380, 386, 390, 434 참조). 예를 들어 “유대교의 에토스는 천민자본주의의 에토스이다.”(주석 386). 베버의 반유대주의에 대해서는 Michael Spöttel, Max Weber und die jüdische Ethik, Frankfurt a.M., 1997.
49) PE, pp. 152ff.
50) 말년의 베버는 근대문화 발전에 대해 이제 “미래에 다가올 모든 예속의 구조물”이 합리적으로 완성되었다고 진단하면서 더욱 비관적이 되었다. Detlev Peukert, Max Webers Diagnose der Moderne, Göttingen, 1989, pp. 83~91.
51) PE, pp. 1~10.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나타난 반가톨릭적 관점과 그 시대적 배경에 대해 Hartmut Lehmann/Gunther Roth eds., Weber’s Protestant Ethic. Origins, Evidence, Contexts, Cambridge, 1993에 있는 Paul Mnch(pp. 51 ~72)와 Thomas Nipperdey(pp. 73~82)의 글을 볼 것.
52) PE, pp. 34~52, pp. 82ff.
53) 베버의 루터교에 대한 종합적 비판의 요지는 루터교가 권위주의에 순응하는 멘털리티를 양산해왔다는 것이다.이에 대해 H. Lehmann/G. Roth eds., Weber’s Protestant Ethic에 실린 Friedrich.W. Graf(pp. 27~51)의 글을 볼 것.
54) 영국은 베버에게 독일의 미래를 위한 모델이었다. Ibid., pp. 83~122 참조.
55) Ibid., pp. 1f.
56) Werner Sombart, Der moderne Kapitalismus, 1. Aufl. 2 Bde., Leipzig, 1902/2. Aul. 3 Bde., München/Leipzig, 1916~1927. 이 글에서는 2판(이하 MK)을 인용함, MK, pp. 1f.
57) Werner Sombart, Der Bourgeois. Zur Geschichte des modernen Wirtschaftsmenschen(original: 1913), Reinbeck bei Hamburg, 1988, p. 192.
58) 좀바르트의 『근대 자본주의』가 관세 논쟁 당시의 자유주의 정치가들에게 어떤 의미로 수용되었으며 어떤 역할을 했는지, 무엇보다 나우만의 서평(Berhard vom Brocke, Sombarts ‘Moderner Kapitalismus’, pp. 107~123)에서 확인할 수 있다.
59) MK, 1. Bd., p. 327.
60) Der Bourgeois, 5, pp. 187~271.
61) Luxus und Kapitalismus(이상률 옮김, 『사치와 자본주의』, 문예출판사, 1997) 참조. 또한 아래의 미주 66번 참조.
62) MK, 1. Bd., pp. 327ff.
63) Der Bourgeois, p. 192.
64) ibid., p. 346.
65) MK, Bd. 1. pp. 896ff., Bd. 2, pp. 3ff., XIff.; Der Bourgeois, pp. 187ff., 341ff.
66) Werner Sombart, Händler und Helden, München et al., 1915, p. 28, passim.
67) 상인 정신의 확산과 ‘고도자본주의’로의 촉진 과정에서 유대인의 역할에 대해 MK, Bd. 1, 896ff;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 및 퓨리타니즘과 유대 정신의 동일시에 대해서는 Die Juden und Wirtschaftsleben, Leipzig, 1911; 좀바르트의 반유대주의에 대해서는 PaulR. Mendes-Flohr, “Werner Sombart’s: The Jews and Modern Capitalism”, Leo Baeck Institute Year Book, XXI (1976), pp. 87~107.
68) MK, 3. Bd., p. 1017.
69) Händler und Helden, p. 145.
70) Ibid., passim.
71) 좀바르트 자신이 스스로 20세기 전환기를 노이로제의 시대로 묘사했다. Joachim Radkau는 자신의 책(Das Zeitalter der Nervositt. Deutschland zwischen Bismarck und Hitler, München, 1998)에서 좀바르트의 명제를 발전시켜 1870년대에서 나치 독일까지를 노이로제의 시대로 파악한다.


(출처 : www.krpia.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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