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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주권[한국개념사총서] 본문

푸코디언 연구

국가 주권[한국개념사총서]

달고양이 Friday 2014. 10. 18. 21:34

 

 

 

 

 서양에서의 국가 개념의 변화 2) 국가이성

 

16세기가 시작될 때까지도 stato는 여전히 중세적 의미를 완전히 탈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stato가 어떤 부가어도 동반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분명한 정치적 의미를 갖는 단어로 정착되어 가고 있었던 사정을 확인할 수 있다. 앞서 마키아벨리의 stato 관념이 갖는 근대적 측면을 논의하면서 그의 stato 관념은 여전히 국가 일반을 지칭하는 societas civilis 또는 civitas와는 거리가 있음을 지적했는데, 그럼에도 그의 stato 정의가 그러한 방향에 보다 가까이 접근하는 것임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stato 개념의 발전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우리는 17세기 초에 유행하기 시작한 국가이성國家理性의 담론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그러한 그 담론의 대표적 논객들은, 비록 예컨대 장 보댕Jean Bodin(1530~1596)에서 보이듯이 질적으로 변화된 국가의 새로운 양상을 지적하거나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1588~1679)와 같은 새로운 철학적 기초를 놓는 시도를 보이지는 않지만, stato라는 단어가 근대 초 유럽의 정치담론에서 더 이상 피하거나 제외할 수 없는 개념으로 정착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지적된다. 이러한 논의는 흔히 마키아벨리에서 유래되는 것으로 많이 지적된다. 그러나 마키아벨리 자신은 국가이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적도 없고 국가를 독자적으로 사고하고, 결정하고, 또한 행동하는 주체로서 거의 보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근대적 의미의 국가이성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설득력 있는 논의도 제시되고 있다.24)
그러나 그 시작점에서의 국가이성론은 기술적 또는 탈윤리적 사고를 오해의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사고는 정치학의 기본문제가 권력조직의 효과적 장악과 유지라는, 즉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경세지술arte dello stato과의 연결 속에서 잘 이해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의미에서 마키아벨리 자신은 국가이성이라는 말을 몰랐어도 근세 초 서양의 국가이성사상을 마키아벨리즘으로 보는 점은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25)
국가이성의 개념에 대한 체계적 논의나 정의는 아니지만 여하튼 그 단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마키아벨리의 동시대인이면서 또 그와 친분관계를 유지했던 그의 고향 후배인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였다고 전해진다. 현실정치를 관통하는 날카로운 인식에 있어서는 마키아벨리에 못지않거나 오히려 앞섰던 것으로도 지적되는 그는, 사람들 특히 정치인들의 행동이 명예나 영광 또는 윤리적 판단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이익interesse에 의해 그 동인이 만들어진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26) 이러한 논의는 마키아벨리에서도 지적되는 부분이지만 이익이라는 명백한 개념을 제시한 것은 그가 처음인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정치의 현실을 바탕으로 정치문제를 논의하는 것을 그는 ‘국가이성과 국가의 관행에 따르는secondo la ragione ed uso degli stati’ 것이라고 말했다.27)
이 ragion(e) di stato라는 말은 1540년대에 이르면 상당히 널리 유포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말이 집중적인 논의의 주제가 되었던 것은 1590년대였다. 이때는 유럽의 각국이 주로 종교문제를 둘러싸고 내란 상태를 겪고 있던 시기였던바 그 해결책의 제시와 관련하여 ragion di stato의 논의가 전개되었다.
이러한 논의를 주도한 저술가들의 공통된 지적 배경은 1500년대 전반까지의 이탈리아 인문주의와는 약간 성격을 달리하는 새로운 인문주의였다. 구인문주의와 결정적으로 차이가 나는 점은 구인문주의에서 중심적 역할을 차지하는 고전 인물이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B.C. 106~B.C. 43)였던 점에 비해 이들 새로운 인문주의자들에게는 타키투스Publius Cornelius Tacitus(55~117)였다. 로마의 고전 저술가들 가운데 정치문제에 대해 가장 회의주의적 입장을 보여 주었던 타키투스가 모델로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은 초월적 가치 규범을 바탕으로 인간 행동을 판단하던 기왕의 지적 풍토의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키케로를 대신하는 타키투스의 등장은 고대 그리스의 카르네아데스Carneadēs(B.C. 214?~B.C. 129?)가 제창한 회의주의와 스토아주의 등과 결합하여 새로운 정치이론의 토대를 제공했는데, 이러한 지적 토대를 마련하는 데 기여한 두 사람의 새로운 인물을 들자면, 프랑스의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1533~1592)와 네덜란드의 립시우스Justus Lipsius(1547~1606)를 들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지적 배경 하에서 이루어진 정치이론에서는 정의 같은 윤리적 문제의 논의가 애써 외면되고, 대신 한 국가의 수장으로서 군주들이 자신의 위치를 유지해야 할 필요성의 문제가 더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28) 그리고 정치행동을 설명하는 기초로서 지금까지의 모든 윤리적 명제가 부인된 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부인하기 어려운 자기 보존 또는 자기 이익의 명제가 제시되었다. 즉,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군주의 행동이나 기타 이익의 추구를 위한 이기적 행동은 더 이상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특히 모든 정치적 행동의 출발점으로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1590년대까지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종교문제를 둘러싼 혼란 상태를 겪고 있었다. 이러한 갈등은 내부로 국한되지 않고 국가 간 분규로도 이어졌는데, 이러한 혼란의 극복 방안으로서 모든 갈등의 당사자 위에 군림하는 새로운 보편적 정치질서의 필요성이 주장되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당시 오토만 제국의 위협으로부터 유럽을 보호하는 기독교 세계의 보호자로 자처하던 최대 강국이었던 스페인의 ‘제국주의’를 정당화하고 옹호하는 논의들이 본격적으로 제출되었다. 이러한 논객들 가운데에서 이탈리아 출신의 가톨릭 신부였던 조반니 보테로는 국가이성의 이름으로 그러한 작업을 수행한 첫 번째의 사람으로 기억된다.
보테로는 1544년에 태어나 예수회 교단의 교육을 받고 성장했지만 세속 군주에 대한 교황의 우월성을 부인하여 이 교단에서 축출되었던 성직자로 오랫동안 밀라노 주교의 보좌 업무를 담당하면서 당시 밀라노를 지배하던 스페인 제국의 정치적 입장에서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전개했다. 그가 관심을 둔 기본문제는 국가의 효과적 운영과 그에 따른 영광의 확보를 위한 군주의 방침과 같은 과거 인문주의 귀감서와 유사한 것이었다. 다만 키케로적 입장 대신에 타키투스적 입장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했다는 점에서 그들과 기본적인 차이를 보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여러 권의 책을 출판했는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1589년에 출판하여 4판까지 발행했던『국가이성론Ragion di stato』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국가이성을 국가의 창건, 유지 및 확장을 위한 수단에 관한 지식으로 정의하면서 군주들의 기본적인 행동 동인이 오로지 이익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에게 국가의 이성은 결국 이익의 논리에 따르는 것, 즉 ‘이익의 이성ragione d’interesse’(=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에 다름 아니었다. 따라서 군주들을 상대하는 사람들은 우정, 가족관계 또는 조약 같은 이익에 근거하지 않는 일체의 것들에 대해 신뢰를 두면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보테로는 이 책의 저술 목적에 관해 이 책을 헌정한 잘츠부르크 대주교에 대한 헌정사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 많은 정치논객들이 마키아벨리와 타키투스를 따르고 있는데 자신은 그들을 불신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견해를 기독교 정신에 따라 교정하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마키아벨리의 교훈 그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의도한 점은 마키아벨리의 가르침이 단순히 이탈리아 국내 정치의 수준이 아니라 가톨릭적 보편주의 또는 제국주의 수준에서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당연히 스페인 또는 합스부르크 왕실의 정치적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물론 단순히 스페인의 정치적 이익을 옹호한 것이 아니라, 당시 유럽 전체의 안전을 위협하던 오토만 제국의 군사적 공세에 효과적으로 맞설 수 있는 단결된 힘의 조직을 위한 스페인의 주도적 역할에 대한 옹호가 그의 논의의 주안점이었다. 이에 따라 그는 ‘진정한’ 국가이성과 ‘어리석고’ 또는 ‘야수적인’ 국가이성을 구분한다. 전자는 기독교 및 유럽의 통일을 위한 정책을 말하고, 후자는 터키와 신교도의 존재를 허용하던 당시 프랑스의 정책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보테로와 거의 같은 시기에 토스카나 공국의 대공을 위해 봉사하던 스키피오네 암미라토Scipione Ammirato(1531~1601)는『타키투스 논고』라는 제명의 책을 저술하고 여기에서 국가이성에 관한 일반이론을 전개한 바 있다. 그는 동물들의 생존을 위한 자연적 본능과 재산과 계약의 안정을 위한 공동체를 형성하는 인간의 능력을 같은 수준에서 논의하면서 이것을 자연적 이성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공공의 복지를 살피고 공동체 또는 공공을 대표하는 군주의 선을 추구하는 것을 국가이성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암미라토의 경우도 터키의 위협에 맞서는 유럽의 단결이라는 기본적 관심사, 즉 가톨릭 보편주의의 시각에서 스페인의 헤게모니를 선양할 의도에서 정치문제를 논의한 것으로 보테로와 같은 논의 맥락에 있었다.
이러한 가톨릭 보편주의의 입장은 이들보다 20여 년 뒤에 태어난 도미니카 교단 출신의 성직자 겸 논객이었던 톰마조 캄파넬라Tommaso Campanella(1568~1639)에 의해서도 반복된다. 다만 그는 스페인의 헤게모니 지위를 공격하고 대신 가톨릭 세계의 통일을 위한 교황의 정치적 우월성을 강조한다. 스페인 제국의 헤게모니가 군사력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에 도덕적 올바름을 대표하는 교황이 통일된 세계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의 논의와 관련하여 중요한 점은 그가 국가이성을 정면으로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에 따르면 고대에는 공동체의 이성ratio politica이 존재했는데, 이것은 형평과 정의의 원칙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현대’의 국가이성ratio status hodierna과 구분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즉, 국가이성은 권력자의 이익을 위해 국내법, 자연법, 신법, 그리고 국제법의 위반을 정당화하는 폭군의 변명일 뿐이라고 말한다.29)
이러한 국가이성의 담론은 17세기 초에는 프랑스에서 반복되었던바 이번에는 프랑스의 외교정책의 정당화라는 실천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1624년에 프랑스 재상에 취임한 리슐리외Richelieu(1585~1642) 추기경은 반反스페인 정책을 공공연히 천명했는데, 이것은 프랑스 왕국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이러한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 그의 주위에 있었던 논객들은 보테로와 암미라토의 국가이성론을 받아들였다. 이들이 제시한 두 가지 주장, 즉 카톨릭 보편주의와 스페인 헤게모니 가운데에서 전자는 받아들이고 후자는 배척했다. 더 나아가 카톨릭 보편주의는 프랑스의 정치적 운명과 결합되어 있다는 점을 주장했다. 특히 리슐리외의 측근으로서 그의 입장을 잘 대변했던 보르도 대학의 법학 교수 프리에작Daniel de Priézac은 리슐리외의 신교도 관용정책과 관련된 비판에 대한 반박으로서 국가이성론의 인정의 필요성을 역설했는데, 프랑스의 생존은 기독교 제국의 영광과 보존에 필수적인 조건임을 강조했다. 따라서 필요하다면 신교도뿐 아니라 이교도와도 동맹할 수 있음을 말했는데, 이것은 프랑스가 합스부르크 제국의 포위를 벗어나기 위해 오토만 제국과 우호적 관계를 맺어 온 사실에 대한 정당화이기도 했다.
리슐리외의 현실주의 정책은 비단 대외정책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의 해임을 공작해 온 왕비 마리 데 메디치와의 정치적 대결을 종식시킨 1630년 11월 11일의 사건Day of Dupes에서 리슐리외는 자신의 정적들을 가차 없이 숙청했는데, 이때의 상황은 법적 절차를 무시한 면이 많았다. 따라서 이 사태의 정당성 또는 적법성을 둘러싸고 상당히 심각한 논쟁이 전개되었는데, 그의 옹호자들이 전개한 정당화의 이론적 근거는 국가의 안전이라는 명제였다. 당시 제출되었던 적지 않은 수의 정당화 논의 가운데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것으로 후대에 전해진 논의는, 이 사건을 직접적으로 옹호하기 위해 쓰인 것은 아니지만, 가브리엘 노데 Gabriel Naudé의 1639년의 팸플릿이었다.30) 이 글에서 노데는, ragione di stato는 왕국의 보존을 위한 규칙들로 일상적인 도덕을 뒤엎을 수 있다는 주장을 폈다. 그가 구체적인 예로 들었던 사건으로는 1572년의 성 바르톨로뮤 축일(8월 24일) 학살사건이었는데, 간접적으로는 1630년의 사건도 암시되었다. 그가 이러한 주장을 펴면서 사용한 논거는 몽테뉴, 립시우스, 또는 샤론Pierre Charron(1541~1603)과 같은 당시의 대표적 회의주의 논객들이었다.
이 국가이성의 논지는 1630년 이후 리슐리외에 의해 공개적인 주장이 고무되었다. 그 내용은 1643년에 쓰인 루이 마숑Louis Machon의 한 글에서 가장 잘 요약된 것으로 평가된다. 즉, “주권자인 군주는…백성의 안전, 공공의 이익 및 국가의 보존이라는 의무 외에 다른 어떤 지도 원리를 갖지 않는다. 백성의 복리가 최고의 법이다(Surema lex salus populi).”
원래는 가톨릭 보편주의의 창달을 위해 제시된 국가이성 개념의 주장은 1630년대 이르러서는 타키투스적 인문주의의 반헌법적 또는 반도덕적 견해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국가이성은 강국의 대외정책을 옹호하는 이데올로기로 바뀌게 되었다.
국가이성론의 본고장인 이탈리아에서는 17세기 후반에 이르게 되면 이 문제에 관한 토론은 거의 그쳤다. 이것은 30년전쟁의 종식과 함께 스페인의 헤게모니적 지위가 사라지면서 생긴 자연스러운 일로 평가된다.31) 대신 이 논의는 독일에서의 독특한 정치 경험과 맞물리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국가이성론의 기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어떤 공공복리에 관련된 필요성이 제기될 경우 국가는 자신이 만든 모든 법률들을 위반하는 것은 전적으로 허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그러한 행동이 신법과 자연법의 테두리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은 지속적인 토론의 대상이 되어 왔다. 여하튼 이러한 주장은 기존의 특권세력을 상대로 당시 새롭게 출현하던 중앙집권적 근대 국가 또는 그 주인인 절대군주가 제기한 권리 요청을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일찍이 봉건 특권세력이 약화되었던 이탈리아에 비해 신분의회를 중심으로 한 구특권세력의 강력한 저항을 극복해야 했던 신흥영토 군주들의 작업은 이 작업을 정당화해 주는 이론적 무장이 필요했었다. 이러한 이론적 필요를 충족시킨 것은 이탈리아에서 기원했던 국가이성론이었다. 초기의 수요는 이탈리아의 보테로나 암미라토의 저술들이 번역되어 충족되었다. 이러한 번역 작업에서 특별한 흥미를 끄는 부분은 아직 ragione di stato에 해당되는 독일어가 없었던 당시 라틴어로 바꾸는 과정에서 독일의 특수한 상황에 맞게 선택된 번역어였다. 독일 지역에서 최초로 이 문제를 다룬 대표적 논객으로 꼽히는, 루터파 대학의 과격한 이론가였던 아르놀트 클라프마르Arnold Clapmar(1574~1604)는 키케로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국가이성론과 결합시키려 한 전형적인 독일의 이론가로서 암미라토의 논의를 바탕으로 국가이성론을 전개했다. 그런데 ragione di stato를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ius dominationis로 옮겼는데, 이를 우리말로 다시 옮긴다면 ‘통치자의 권리’에 가까운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번역을 통해 그가 의도한 바는, 자신의 정치체제를 지키기 위해서 또는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기성의 법률을 변경하거나 무시할 수 있는 통치자의 권리 내지는 특권이었다.
이탈리아인들이 널리 사용하던 국가이성의 개념은 독일에서는 부분적으로는 거부되면서 수용되었다. 독일의 전통적인 도덕관념에 위배된다는 이유 때문에 이 국가이성의 개념에 대해 독일어의 직역에 해당되는 Staatsräson의 사용이 의식적으로 거부되고, 대신 라틴어로 된 ratio status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32) 번역어 명칭에 무관하게 독일 지역에서 이 국가이성 개념의 사용은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던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정치적 포부를 옹호하는 데 사용되기 시작했다. 대표적 경우로 에퍼헨W. F. von Efferhen(1530~1590) 같은 법률가는 당시 황제였던 페르디난트 2세Ferdinand Ⅱ(1578~1637)를 위해 가톨릭을 바탕으로 하는 통일독일의 필요성을 역설했다.33)
그러나 이 국가이성의 개념이 반드시 중앙집권 체제를 지향하던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옹호하는 이데올로기로 사용된 것만은 아니었다. 예컨대 스웨덴 왕실의 대변인 역할을 수행했던 켐니츠Bogislaw Chemnitz (1605-1678)는, 독일제국을 하나의 군주국이 아니라 군주들로 구성된 귀족정체로서 규정하면서 황제가 아닌 제국의회Reichstag가 제국 국가res publica des Reiches의 주권의 주체라고 역설했다. 이러한 국가의 이성은 고대 독일의 자유의 정신과 일치하는 것으로 그는 주장했다.
이렇게 국가이성의 개념은 여러 가지의 다양한 정치적 입장을 지지하는 논의로 사용될 수 있었는데, 실제 우리의 논의와 관련하여 중요한 점은 17세기 전체에 걸쳐 state/status라는 단어가 논의된 것은 거의 전적으로 국가이성ragione di stato, ratio status의 논의 맥락에서였다는 점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빈번하게 논의되는 과정에서 status/state를 한정하는 수식어가 떨어져 나가고 그 단어가 독립적으로 사용되면서 점차 당시까지 국가 일반을 지칭하는 res publica/commonwealth와 사실상의 동의어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그 결과 바이나하트가 지적하고 있듯이, 국가state/status는 17세기 중반 이후 애매하고 또한 오해를 유발하기는 했지만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정치의 단어로서 지속적으로 관심을 얻게 되었고, 뒤에는 우선적으로는 대내적인 그리고 다음으로는 대외적인 통일의 개념으로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과정에서 state/status는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아우르고 또한 다양한 종류의 정치공동체를 대표하는 상위 개념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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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Hexter(1973), 앞의 책, pp. 168~173.
25) 독일의 역사학자 Friedrich Meinecke의 Die Idee der Staatsräson in der neueren Geschichte(1924)의 영역판의 제목은 이러한 뜻에서 Machiavellism으로 되어 있다.
26) 마키아벨리와의 관계 및 비교의 측면에서 귀차르디니를 다루고 있는 종합적인 안내로는 Felix Gilbert(1965), Machiavelli and Guicciardini: Politics and History in Sixteenth Century Florence, Princeton, N. J.: Princeton University Press 참조. 르네상스기 이탈리아 정치사상의 전반적 구조 속에서의 논의로는 Maurizio Viroli(1992), From Politics to Reason of State: The Acquisition and Transformation of the Language of Politics 1250~1600,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특히 4장 참조.
27) Richard Tuck(1993), Philosophy and Government 1572~1651,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pp. 38~39.
28) Tuck(1993), 앞의 책, pp. 45~56.
29) Viroli(1992), 앞의 책, p. 267.
30) Considérations politiques sur les coups d'estat(1639).
31) Friedrich Meinecke(1957), Machiavellism: The Doctrine of Raison d'Etat and Its Place in Modern History, D. Scott, tr., London: Routledge and Kegan Paul, pp. 126~127.
32) Otto Brunner, Werner Conze and Reinhart Koselleck (eds.), Gechichtliche Grundbegriffe, vol. 7, “Staat and Souveränität” 항목 vol. 7 (이하 Geschichtliche Grundbegriffe로 약칭), p. 16.
33) Geschichtliche Grundbegriffe, vol. 7, p. 13.
34) Weinacht(1962), 앞의 책, pp. 171~172.

(출처 : www.krpia.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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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국가 개념의 시작 (4) 을사보호조약과 국가 의식의 분출

 

1899년 12월 4일자로『독립신문』이 폐간되면서 정치/사회문제에 대한 여론 형성층의 기본적인 입장은『독립신문』을 주도했던 개화파의 입장에 비하면 전통적 사고유형으로 상당히 복귀했다. 즉, 1899년에서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전후한 시기의 논의들 중에서 다수의 입장으로 보였던 논조는 유학의 활성화를 통한 신문물의 도입을 주장하는 구본신참舊本新參 또는 신구참작新舊參酌이라는 1880년대의 동도서기론으로의 회귀였다. 이러한 논의를 주장하던 지식인들은 대부분 대한제국의 관료층 인사였다.
유길준과 함께 갑오개혁에 핵심이론가로 참여했던 김윤식金允植도 그 대표적 인물의 하나였고,『황성신문皇城新聞』 창간에 직접 참가했던 박은식朴殷植이나 장지연張志淵 등도 여기에 속하는데, 이러한 입장을 체용體用의 입장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들의 입장은 유교권도 서양 문명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독자적 문명을 이루고 있지만, 당시로서는 서양 문명이 앞서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입장에서 서양 문명의 적극적 도입을 권장한다. 하지만 유교의 경전만은 만고에 불변한 도덕원리이기 때문에 유교를 새로이 하는 데 힘써야 하고, 유교권 안에 존재하는 문명의 요소를 발굴하는 작업에 매진해야 한다는 주장이 전개되었다. 이렇게 유교를 본으로 삼고 신학(서양 문명)을 참작하여 절충하되 장단점을 고려하여 병행하지는 것이 이들의 기본적 주장이었다.138)
이 당시 이러한 정치/사회문제에 대한 의견 개진은 신문 외에 특정의 의견 개진을 위해 결성되었던 사회단체들이 발간하던 정기ㆍ부정기 간행물을 통해 이루어졌었는데, 여기에 포함된 주제들에는 제국주의 침략의 문제와 당시 지방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나던 의병의 문제 등이 포함되었다.139) 이러한 간행물과 신문 등을 통해 토론된 중요한 주제들에는 이러한 토론이 진행되던 중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계기로 국권이 사실상 상실되면서 국가의 문제가 가장 중요한 토론의 주제로 등장하게 되었으며, 이와 함께 많은 새로운 간행물들이 발간되기 시작했는데 대부분 2~3년간 발행되다가 종간했다. 이러한 잡지들에는『대한유학생회학보大韓留學生會學報』,『대한장강회월보大韓自强會月報』,『대한협회보大韓協會會報』,『서우西友』,『서북학회월보西北學會月報』,『기호흥학회월보畿湖興學會月報』,『대조선독립협회회보大朝鮮獨立協會會報』,『태극학보太極學報』,『호남학보湖南學報』,『대한학회월보大韓學會月報』,『대한흥학보大韓興學報』 등이 포함된다.
1905년 이전에 국가의 문제가 상대적으로 덜 토론되었던 것은 당시의 토론 참가자들의 정치적 성격과 관련되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국가문제에 대한 토론은 기본적으로 정체에 관련된 논의로 여겨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처음으로 서양식 국가론을 소개했던 유길준의 경우에도 국가문제의 논의는 대부분 정체의 문제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잘 나타난다. 그런데 정체의 문제를 논의할 경우 기본적으로 당시 대한제국의 황제체제, 즉 군주제를 논의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데 이것은 정치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었다. 토론에 참여하던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관료층을 겸하던가, 아니면 이들과 기본적으로 유사한 정치적 입장에 있었다. 따라서 이들이 정체의 문제를 논의할 경우는 군주제를 적극 지지하든가, 아닐 경우 언급을 피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이해된다.『황성신문』의 주필이었던 장지연은 1904년 다른 지식인들과 함께 중추원에 55개조의 「시정개선안」을 제출했는데, 이 개선안의 1조에서 4조까지는 입법, 사법 및 행정의 모든 통치 분야에서 황제의 절대권을 인정한다는 점을 명백히 하는 조항으로 되고 있고, 이 점을 전제로 하면서 민권도 보장되는 체제의 도입을 건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140)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 대부분의 시정개혁안은 일단 군주제에 대한 의심이 없다는 사실을 항상 명백히 하고 시작했어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분위기는 1905년의 을사보호조약을 계기로 급히 바뀌어 갔던 것으로 보인다. 국권상실을 계기로 국가사상을 고취시킨다는 실천적 필요성에 따라 ‘국가’라는 단어를 전면에 내세운 ‘국가학’이라는 제목의 저작이 나오기 시작했다. 국권회복에 대비하여 국가에 관해 이론적으로 무장하여야 할 필요성이 절박하게 인식되었다. 그리고 국권상실이 국민들의 부족한 국가의식, 민족정신 또는 민족사상에도 그 한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았던 당시의 논객들은 이러한 것을 극복하고 국가를 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서양 정치학의 수학을 통해 국가 또는 정치현실을 바르게 알고 이를 바탕으로 국민리복을 추구해야 한다는 논지를 전개하기도 했다.141)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의 후신인 대한협회의 기관지를 통해 여러 편은 논설을 저술했던 김성희金成喜는 민족정신, 입헌정치, 정치사상의 배양 등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역설하여 정치학 또는 국가문제에 관한 체계적 연구와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다.142)
이러한 국민계몽의 필요성에 대한 자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첫 번째의 작업들 가운데 우선 언급되어야 할 것으로는 1905년(또는 1906년)에 출판된『국민수지國民須知』라는 제명의 소책자가 그것이다. 이 글의 저자들로 추측되는 인물들은 일본 메이지 헌법을 상세히 연구한 지식인들로143) 그들의 목적은 황실 또는 왕조와 구별되는 근대적 국가의 관념을 국민들에게 심어 주고 올바른 정치관에 입각하여 자신의 문제를 설정할 수 있는 기초적 이론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체계적인 정치학 연구의 필요성이 강조되는 분위기 속에서 이 분야에 관한 서책들이 출간되기 시작했는데, 이 방면의 이론적 축적을 전혀 갖지 못하던 상황에서 지식인들이 급히 할 수 있었던 일은 자신들이 보기에 당시 조선의 문제와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외국에 저명 저술을 번역하여 소개하는, 당시의 일반적인 표현으로는 ‘강술講述’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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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김도형(1994), 『大韓帝國期의 政治思想硏究』, 지식산업사, p. 49. 이러한 경향의 사유를 대표하는 『황성신문』그룹의 사유 경향에 대해서는 길진숙(2006), 「문명의 재구성 그리고 동양 전통 담론의 재해석: 『황성신문』을 중심으로」,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편, 『근대계몽기 지식의 발견과 사유 지평의 확대』, 소명출판, pp. 13~47 참조.
139) 김도형(1994), 앞의 책, pp. 65~94.
140) 김도형(1994), 앞의 책, pp. 95~96. 실제 1900년을 전후한 당시 대부분의 국가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지식인들에게 가장 큰 문제의 하나는 전제정치의 청산이었다. 따라서 국가문제에 대하여 논의를 시작한다고 하면 일단은 이 문제를 건드리고 시작하여야 한다는 점이 왕정의 지지자나 반대자 모두에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141) 김도형(1994), 앞의 책, p. 97.
142) 김도형(1994), 앞의 책, pp. 97~98.
143) 『國民須知』의 저자는 불명이나 장기렴, 이준, 윤효정, 심의성 등이 설립한 ‘헌정연구회’의 학술단체의 이름으로 1905년에 출간된 『憲法要義』의 내용과 거의 중복된다. 이 책은 그 일부가 『황성신문』1905년 8월에서 12월 사이에 연재된 바 있는데, 『국민수지』의 내용과 같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 글이 만들어지는 전후 사정에 관해서는 김효전(1996), 앞의 책, pp. 410~411, pp. 420~422 참조. 그리고 이 책 pp. 422~431에는 『국민수지』의 전문이 수록되어 있다.


(출처 : www.krpia.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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