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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코, 사유와 인간

달고양이 Friday 2014. 10. 3. 22:03

 

 

폴 벤느 지음, 이상길 옮김

☆푸코, 사유와 인간(산책자, 2009)

 

 

우리는 푸코의 사유을 잘 알고 있는가? 이 물음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폴 벤느의 저작입니다.

 

폴 벤느 지음, 이상길 옮김,『푸코, 사유와 인간』(산책자, 2009)에서 소개하는 광기의 역사 내용을 옮겨본다.

 

제1장. 세계사 안의 모든 것은 특이하다. '담론'

 

『광기의 역사』가 출간되었을 때, (나를 포함해서) 그것을 가장 잘 평가할 수 있었던 프랑스 역사가들은 그 책의 중요성을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푸코가 단순히 사람들이 수 세기에 걸쳐 광기에 대해 가졌던 관념이 엄청나게 변화해왔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을 따름이라고. 그런데 이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는 바가 없다. 우리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인간현실은 근본적인 우발성을 드러낸다.(이것은 잘 알려진 '문화적 자의성'이다) 아니 최소한 그것은 다양하고 가변적이다. 역사적 불변항이나 본질, 자연적 대상물은 없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광기, 섹슈얼리티, 처벌, 또는 권력에 대해 [지금 시각에서 보자면] 낮선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마치 이 오류의 시대는 지나갔고 우리는 조상들보다 더 잘하고 있으며, 그들이 그 주변을 맴돌았던 진리를 안다고 우리가 별만 없이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일이 돌아간다. "이 그리스 텍스트는 그 시대의 개념화에 따라 사랑을 이야기한다"고 우리는 말했다. 그런데 사랑에 대한 우리의 근대적 관념은 그들의 것보다 더 나은 것인가? 만일 이 무익하며 시대에 뒤떨어진 질문이 제기디었다면, 우리는 감히 그렇다고 우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철학적으로 진지하게 생각했던가? 푸코는 진지하게 그렇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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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는 이 거울, 지식에 대한 이 '반영적인' 개념화를 믿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물질성을 가진 대상은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는 형식의 틀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그것을 푸코는 '담론'이라는, 잘못 선택된 단어로 불렸다. 모든 것이 여기 있다.

실재에 대한 비상응으로 개념화된 진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제대로 이해되지 못했고, 푸코에 따르면 광인들은 미치지 않았으며 광기에 관한 이야기는 이데올로기라는 식으로 믿게 만들었다. 심지어 레이몽 아롱 같은 이도 『광기의 역사』를 다르게 이해하지 못했으며, 내게 그것을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광기는 너무도 현실적인 것이며, 이를 알려면 광인을 한 명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그는 반박했다. 아롱이 옳았다. 푸코 자신도 광기가, 그것에 관한 담론이 이전에 말했고 현재 말하고 있고 앞으로 말할 것은 되지 않을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공언했다.

그렇다면 푸코는 담론이라는 말로 무엇을 의미하려 했을까? 아주 간단한 무언가. 즉 날것의 역사적 구성물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촘촘한 묘사이며, 그 궁극적 개별적 차이에 대한 규명이다. 이처럼 과거의 특이성의 궁극적 차이까지 이르는 일은 이해력의 지적 노력을 요구한다. 사건을 평범하게 만들고 합리화하는 너무 넓은 휘장들을 사건으로부터 벗겨내야만 한다. 그 결과는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될 것처럼, 아주 멀리까지 나아갈 것이다.

첫 번째 책에서 푸코는 우리가 광기라고 부르는 담론(과거의 담론은 그것을 비이성이라고 말했다)을 규명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 이후의 책들은 그가 이 세부경험으로부터 뽑아낸 회의주의 철학으로 다른 주제들에 대해 예증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자신은 자기의 주의주장을 결코 온전히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이 엄청난 작업을 주석가들에게 미뤄놓았다. 난 여기서 내 절친한 친구였으며 위대한 사상가인 푸코의 사유를 설명해보고자 한다. 나는 말한 것과 쓴 것에서 풍부하게 인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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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보았듯이, 우리는 선개념없이 "구체적 사실들"의 세부사항으로부터 출발했다. 이렇게 우리는 여러 변이형을 발견했는데, 그것들은 너무도 독자적이어서 그 각각이 하나의 고유한 테마를 이룰 정도인 것이다. 나는 테마와 변이형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푸코는 더 나은 표현을 썼다. 1979년 그는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역사의 강판에 보편소들을 지나가게 하지 말고, 보편소들을 거부하는 사유의 흐름을 역사가 지나가도록 만들것" 존재론적으로 말하자면, 변이형들만이 존재한다. 초역사적인 테마는 의미 없는 하나의 이름일 따름이다. 푸코는 막스 베버처럼, 그리고 모든 좋은 역사가들처럼 명목론자다. 발견을 위해서는 실천의 세부사실, 행해진 것과 말해진 것으로부터 출발해 그것들의 담론을 명료화하기 위한 지적 노력을 기울리는 편이 낫다. 그것은 잘 알려진 일반론으로부터 출발하는 것보다 더 생산적이다.(하지만 역사가에게나 그 독자들에게는 더 어렵다). 일반론에서 출발한다면, 그것을 계속 그대로 따르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일반론을 공허한 것으로 되돌려 버릴, 궁극적이며 결정적인 차이들을 포착하지 못한 채 말이다.

신체형은 잊어버리고 이제 쾌락으로 다시 돌아와보자. 우리는 이교도적 쾌락과 기독교적 '육신'(신의 창조물이기에 따라야 할 자연의 육신이자 죄악에 빠진 육신이라는 담론)을 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 그 뒤를 이어 다른 담론들이 나타났다. 생리학, 의학, 정신의학 등이 기여했던 근대인들의 '섹스'라는 담론(Arnold I. Davidson, The Emergence of Sexuality;Historical Epistemology and the Formation of Concepts, 2004-http://www.hup.harvard.edu/catalog.php?isbn=9780674013704), 그리고 아마도 페미니즘과 더불어 등장한 탈근대의 '젠더' 담론과 관대한 자유방임, 아니 차라리 자기 자신이 되고 그것을 말할 수 있는 주관적 권리의 담론. 게다가 우리는 각각의 '담론'이 사랑을 둘러싸고 배치된 한 무리의 요소들, 관습, 말, 지식, 규범, 법, 제도 등을 작동시킨다고 추정할 수 있다. 역시 담론적 실천이라든지, 아니면 우리가 다시 논의할 의미가 담긴 단어인 장치라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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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우리가 섹슈얼리니나 광기에 대해 가지는 관념(무의식적, 암묵적 '담론'이 가능한 한 꼭 맞게 포착하는 관념, 담론이 우리는 보지 못하는 특이성과 기이성을 가장 정확하게 말하는 관념), 이 관념은 그 담론과 더불어 어떤 '물자체'(칸트의 용어를 남용하며 난 이렇게 말하겠다). 그것이 표상한다고 자처하는 어떤 실재와 분명히 연관을 맺는다. 섹슈얼리티나 광기는 확실히 존재한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의 발명품이 아니다. 이 문제에 관해 한없이 사색해본들 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인간은 성적 동물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남아 있으며, 생리학과 성본능이 그것을 증명한다. 사람들이 수 세기를 지나며 사랑 혹은 광기에 관해 사유했던 모든 것은 물자체의 자리잡기로서 그 존재를 알려준다. 어쨌거나 우리는 이것들에 일치하는 진리를 가지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각 시대에 물자체에 대해 가지게 되는 관념(담론은 그러한 관념의 궁극적인 표명, 궁극의 차이다)을 통해서만 물자체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물자체에 '현상'으로서만 도달한다. 물자체를 '담론'과 분리시키 수 없기에 그렇다. 물자체는 담론 안에 속박되어 있는 것이다. 푸코는 "모래톱 안에 좌초해 묻혀있다"고 표현하길 좋아했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전제들이 없이는 아무것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만일 담론들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우리가 잇달아 신들림, 비이성, 광기, 정신착란 등으로 보았던 X라는 대상은 존재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정신 속에 그것의 자리 잡기와 관련해서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모든 현상은 특이하다. 역사적이거나 사회학적인 모든 사실은 하나의 특이성인 것이다. 푸코는 일반적이고 초역사적인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행위든 말이든, 인간적 사실은 그 기원이 될 법한 이성이나 자연으로부터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을 충실하게 반영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현혹하는 일반성이나 미리 전제되는 기능성을 넘어서, 이 특이성은 인간적 사실의 기묘한 담론이 지니는 특이성이다. 그것은 매번 변전의 우연으로부터, 교차하는 인과성들의 복잡한 연쇄로부터 생겨난다. 인류 역사의 기초는 실재적인 것도, 합리적인 것도, 기능적인 것도, 그렇다고 무슨 변증법도 아니다. 온갖 기능주의, "온갖 단조로운 목적성 바깥에서, 사건들의 특이성을 식별"해야만 한다. 푸코가 사회학자들, 역사학자들에게 했던 암묵적 제안(푸코와 나란히, 어떤 연구자들은 그 제안을 스스로 실천에 옮겼다)은 역사적 구성물, 또는 사회적 구성물에 대한 분석을 가능한 한 멀리 밀고 나가 그 특이한 이질성을 드러내라는 데 있었다.

 

각 시대에는 나름의 어항이 있다.

 

이 특이성을 푸코는 담론을 비롯해, 담론적 실천, 전제, 에피스테메, 장치 등과 같은 말로 환기시켰다. 푸코의 사상은 해가 지날수록 명확해져 갔고 기술적인 어휘는 오랫동안 유동적이었다. 이 상이한 용어들을 길게 늘어놓기보다, 대표적인 한 가지(즉 담론)을 고수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우리는 인간사를 일반론을 통해 사고한다. 우리는 그것이 [대상과] 일치한다고 믿지만, 인간적인 어떤 것오 일치하지도, 합리적이지도, 보편적이지도 않다. 이는 우리의 양식을 놀라게 하고 불안하게 만든다.

우리를 안심시키는 어떤 허상은 일반론을 통해서 담론을 파악하게 만든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담론의 다양성과 그 각각의 특이성을 알 수 없는데도 말이다. 우리는 보통 진부한 것들, 일반성들을 바탕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담론은 우리에게 '무의식적인' 것으로 남아 있고, 우리 시선을 벗어난다. 아이들은 모든 남자를 아빠로, 모든 여자를 엄마로 부른다고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첫 문장은 말한다. 담론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푸코가 고고학 또는 계보학이라고 부른 작업을 수행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 고고학은 신화를 벗겨내는 결산서다.

이유는 이렇다. 현상의 궁극의 차이, 즉 현상을 기술하는 담론에 도달할 때마다 우리는 현상이 기묘하고 자의적이며 근거 없다는 점을 틀림없이 발견한다(우리는 그것을 위에서 역사적 경계들의 도면에 비교했다). 결산서: 이처럼 여러 현상의 심층에까지 가면, 우리는 각각의 특이성과 모든 것의 자의성을 확인하게 되고, 추론에 따라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지식에 대한 철학적 비판, 인간사에 토대가 없다는 확증, 그리고 일반론에 대한 회의주의.

일반론을 말하지 않는 역사책과 물리학 책은 분명히 진실로 가득차 있다. 그런데도 철학자들이 논하는 인간주체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주체가 아니다. 그는 시간도 진실도 지배하지 못한다. "우리 각자는 사람들이 자기 시대를 생각하는 것처럼만 생각할 수 있다"고 푸코의 에콜 노르말 동급생이자 철학교수시험을 함께 봤던 장 로드메송은 썼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푸코의 의견에 동의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그스티누스, 그리고 보쉬에까지도 노예제에 대한 비난에는 이를 수는 없었다. 몇 세기 뒤에, 그것은 자명한 사실처럼 나타난다." 마르크스를 부연하자면, 인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순간에 제기한다. 노예제와 그것을 지탱했던 모든 법적, 정신적 장치가 붕괴될 때, 그것의 '진실' 또한 붕괴된다.

각 시대마다, 동시대인들은 이렇게 짐짓 투명한 어항 같은 담론속에 갇혀 있다. 그들은 이 어항이 어떤 것인지, 심지어 거기 어항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릇된 일반성과 담론은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하지만 매 시대에 그것들은 진실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진리는 진실을 말하기, 즉 사람들이 진실로서 수용하는 것에 부합하게 말하기로 환원되고, 이는 한 세기 뒤에(후세의 사람들은) 웃게 만들 것이다.

푸코식 탐구의 독창성은 시간 속에 있는 진실에 관해 작업하는 데 있다. 이를 예증하기 위해 아주 순진한 이야기로 시작해보자. 푸코 저작의 배후에는 - 하이데거에게서와 마찬가지로-공리난 다름없으며 압도적인 말해지지 않은 것이 숨어 있다. 인류의 오래된 과거와 최근의 과거는 죽어버린 거대 진리들의 광대한 묘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한 세기도 더 오래 전부터, 아니 천 년도 더 오래 전부터 하나의 자명한 사실이 되었다. 그런데 동일한 장기지속 동안, 위대한 철학은 이 원초적 진리와는 다른 많은 것들을 사유했다. 헤겔, 콩트, 후설 같은 사상가는 제각기 방황의 시대를 몸소 마감할 수 있길 희망했다. 반면 푸코는 이 묘지의 문제를 공격하고 나섰고, 이를 개인적이며 예기치 않은 연구 각도에서 수행했다. 그것은 바로 '담론'에 대한 심층적인 발굴이었고, 역사적 구성물들 간 궁극적 차이의 명료화였으며, 이를 통한 마지막 일반론들의 종말이었다.

.... 푸코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당연한 듯 행하는 것, 진리라고 여기면서 말하는 것부터 출발한다. ....  그는 거기에서 표본(광기, 처벌, 섹스 등)을 추출해 담론은 명료화하고 경험적 인류학을 끌어낸다.

어떤 담론, 담론적 실천의 명료화란 사람들이 행하거나 말했던 것을 해석하는 일이며 그들의 행위, 말, 제도가 전제하는 것을 이해하는 일이다. 이는 우리가 매 순간 수행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우리끼리 서로를 이해한다. 푸코의 도구는 따라서 일상적인 실천인 해석학, 의미의 규명이 될 것이다.

중략......

경험적 자료의 실증성을 파악하게 할 따름인 이 해석학은 1960년대 이루어진 언어적 전환의 대척점에 있었다는 점을 재빨리 덧붙여두자. 언어적 전환은 푸코에게 소중했던 견고한 실증성을 무한한 해석 속으로 사라지게 만들었다. 어디서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난 "모든 것을 상대화시키고 모든 것이 해석의 문제라고 단언하는, 대체로 푸코의 신봉자들로부터 유래한 탈근대 사조"에 대한 혹평을 읽었다. 신봉자들이 어떤지 난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푸코 자신과 관련해서는 이 말은 완전히 틀렸다. 텍스트와 그에 대한 해석은 같지 않다고 확신하면서, 어떤 텍스트의 저자가 자기 시대에 말하고자 했던 바를 가장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푸코의 근본적인 방법이 있다.

사실 우리는 그에게서 일종의 해석학적 실증주의를 발견한다. 우리는 자기에 대해, 세계에 대해, 선에 대해 확실한 그 무엇도 알 수 없지만, 살았든 죽었든 우리끼리는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서로 잘 이해할 수도 있고, 잘못 이해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다른 문제다. 어쨌거나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는데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유의 환원 불가능성의 원리' 때문에 해석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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