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광기의 역사(푸코) 본문

푸코 도서관

광기의 역사(푸코)

달고양이 Friday 2014. 10. 3. 21:43

 

 

     이규현 역, (나남출판, 2003)                                 김부용 역, (인간사랑, 1999년)

 

 

 

폴 벤느 지음, 이상길 옮김,『푸코, 사유와 인간』(산책자, 2009)에서 소개하는 광기의 역사 내용을 옮겨본다.

 

『광기의 역사』가 출간되었을 때, (나를 포함해서) 그것을 가장 잘 평가할 수 있었던 프랑스 역사가들은 그 책의 중요성을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푸코가 단순히 사람들이 수 세기에 걸쳐 광기에 대해 가졌던 관념이 엄청나게 변화해왔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을 따름이라고. 그런데 이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는 바가 없다. 우리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인간현실은 근본적인 우발성을 드러낸다.(이것은 잘 알려진 '문화적 자의성'이다) 아니 최소한 그것은 다양하고 가변적이다. 역사적 불변항이나 본질, 자연적 대상물은 없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광기, 섹슈얼리티, 처벌, 또는 권력에 대해 [지금 시각에서 보자면] 낮선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마치 이 오류의 시대는 지나갔고 우리는 조상들보다 더 잘하고 있으며, 그들이 그 주변을 맴돌았던 진리를 안다고 우리가 별반 없이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일이 돌아간다. "이 그리스 텍스트는 그 시대의 개념화에 따라 사랑을 이야기한다"고 우리는 말했다. 그런데 사랑에 대한 우리의 근대적 관념은 그들의 것보다 더 나은 것인가? 만일 이 무익하며 시대에 뒤떨어진 질문이 제기되었다면, 우리는 감히 그렇다고 우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철학적으로 진지하게 생각했던가? 푸코는 진지하게 그렇게 했다.

중략..............................

푸코는 이 거울, 지식에 대한 이 '반영적인' 개념화를 믿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물질성을 가진 대상은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는 형식의 틀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그것을 푸코는 '담론'이라는, 잘못 선택된 단어로 불렸다. 모든 것이 여기 있다.

실재에 대한 비상응으로 개념화된 진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제대로 이해되지 못했고, 푸코에 따르면 광인들은 미치지 않았으며 광기에 관한 이야기는 이데올로기라는 식으로 믿게 만들었다. 심지어 레이몽 아롱 같은 이도 『광기의 역사』를 다르게 이해하지 못했으며, 내게 그것을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광기는 너무도 현실적인 것이며, 이를 알려면 광인을 한 명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그는 반박했다. 아롱이 옳았다. 푸코 자신도 광기가, 그것에 관한 담론이 이전에 말했고 현재 말하고 있고 앞으로 말할 것은 되지 않을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공언했다.

그렇다면 푸코는 담론이라는 말로 무엇을 의미하려 했을까? 아주 간단한 무언가. 즉 날것의 역사적 구성물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촘촘한 묘사이며, 그 궁극적 개별적 차이에 대한 규명이다. 이처럼 과거의 특이성의 궁극적 차이까지 이르는 일은 이해력의 지적 노력을 요구한다. 사건을 평범하게 만들고 합리화하는 너무 넓은 휘장들을 사건으로부터 벗겨내야만 한다. 그 결과는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될 것처럼, 아주 멀리까지 나아갈 것이다.

첫 번째 책에서 푸코는 우리가 광기라고 부르는 담론(과거의 담론은 그것을 비이성이라고 말했다)을 규명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 이후의 책들은 그가 이 세부경험으로부터 뽑아낸 회의주의 철학으로 다른 주제들에 대해 예증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자신은 자기의 주의주장을 결코 온전히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이 엄청난 작업을 주석가들에게 미뤄놓았다. 난 여기서 내 절친한 친구였으며 위대한 사상가인 푸코의 사유를 설명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