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연재] 서울 그 때를 아십니까? 조금만 열이 있어도 전염을 구실로 '병막'에 가두었다. 본문
“환자 등에 우표 3장” |
연재 | 서울 그때를 아십니까? |
출처: http://www.weeklyseoul.net/newsview.asp?mode=view&class=601&seq=22359 |
일제 시대 근대적 의료시설의 혜택을 받기 어려웠던 조선인들은 나름대로 `비방`을 이용, 질병을 퇴치하고자 했다. 말라리아 환자에게는 우체국 소인이 찍힌 우표나 엽서를 태워 그 재를 냉수에 타서 먹이거나, 환자의 등에 우표 석 장을 붙이기도 했다. 관청의 힘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 어떤 이는 철교 아래에 환자를 매달아 놓아 기차가 지나갈 때 겁에 질려 말라리아 귀신이 도망가길 빌었다. 1924년 독감이 크게 유행하자 일본 순사의 이름이나 조선 총독의 이름을 이마에 붙이기도 했다. 조선 총독부가 전염병보다 더 무섭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진은 늦게나마 근대 의료의 혜택을 받았던 사람들이다.
일제는 1915년 `전염병 예방령`을 공포하고, 뒤어어 세칙을 마련해 콜레라·장티푸스·천연두 등 9종을 전염병으로 규정했다. 일제는 조선사람이 조금만 열이 있어도 전염을 구실로 마구잡이로 `병막`에 가두었다. 그러나 병막은 기초적인 의료설비나 의료진도 없는 그야말로 죽음의 감옥이었다. 사진은 1909년 인왕산 기슭에 설립된 경성부립순화병원이다. `순화병원`이란 일종의 전염병 환자 격리 수용병원이었다.
일제는 우리의 전통의학을 인정하지 않았다. 한의사나 한약사란 칭호도 없애버리고, 의생 또는 약종상이라고 천시해 불렀으며, 자격시험마저 없앴다. 이 때문에 한의사의 수는 갈수록 크게 줄어들었고, 한의학은 침체될 수밖에 없었다. `돌팔이 한의사`란 나쁜 용어는 바로 이 때부터 비롯되기 시작했다.
1930년대 초 국제연맹에서 동양의학(한의학)을 크게 주목하고, 우리 전통의학계 또한 우리 의학 지키기에 나서면서부터 다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일제 또한 경성제국대학에 한약강좌를 설치하고, 경성의 순화병원에 한방치료부를 특설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규장각·존경각 등이 있어 도서관의 기능을 담당해 왔다. 3·1 만세운동 이후 일제는 형식적이나마 조선인의 문화활동을 허용했으며, 이에 이범승은 1921년 경성도서관(현 종로도서관)을 설립했다. 그러나 최초의 사립 공공도서관이었던 경성도서관은 자금난으로 1926년에 경성부에 양도됐다. 일제는 1922년에 경성부립도서관(남산도서관의 전신)을 세웠으며, 1923년에는 총독부도서관을 세웠다.
경성부립도서관은 1922년 10월, 명치정(현 명동)에서 문을 열었다. 그리고 1927년 5월 장곡천정(현 소공동) 115번지에 있던 대관정으로 이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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