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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법원판결록 한글번역 첫 결실

달고양이 Friday 2014. 12. 4. 17:35

(서울= 고웅석.류지복 기자) 광복 60주년을 앞두고 과거사 규명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일제 시대 초기의 `고등법원판결록'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이 첫 결실을 거뒀다.

법원도서관은 6일 사법권이 일제에 넘어갔던 1909년부터 1943년까지 대한제국 대심원 및 통감부ㆍ조선총독부 고등법원에서 선고된 민ㆍ형사 사건의 판례집인 `고등법원판결록' 30권(낱권으로는 36권) 중 제 1권을 완역, 발간했다고 밝혔다.

당시 1심 재판은 지방재판소가, 항소심은 `공소원'이, 상고심은 `고등법원'이 맡은 점에 비춰 이 판결록은 일제의 대법원 판례집에 해당하는 것으로 시대상과 법률문화 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나 일본 고문어체로 작성돼 법제사 연구자 조차도 쉽게 해독하기가 어려웠다.

이에따라 법원도서관은 작년 4월 일본어에 능통한 법대 교수와 변호사 7명에게 번역을 의뢰하고 일본에서 장기연수한 법관들이 감수토록 해 이번에 첫 성과물을 내놓을 수 있었다고 법원도서관측이 밝혔다.

열람실에 소장된 2만쪽 분량의 판결록 전권 가운데 1909∼1912년 사이의 형사사건 51건, 민사사건 125건을 다룬 제 1권의 국역본을 출간하게된 것이다.

형사와 민사편 각 한권으로 나뉘어 출간된 제 1권의 형사편에는 항일의병대원의 헌병보조원 살해와 구한국의 은화 위조, 아편 흡입기구 소지, 관문서 위조, 절도, 상해치사, 살인, 강도, 도박 등 각종 형사사건이 망라돼 있다.

특히 백야 김좌진 장군이 1911년 북간도에 독립군 사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군자금을 조달하려고 친척인 김종근을 찾아갔다가 경찰에 잡혀 기소돼 징역 2년6월을 선고받은 사건도 포함돼 눈길을 끌었다.

민사편에는 탐관오리의 횡포로 자신의 재산을 빼앗겼다거나 관직을 얻기 위해 제공한 뇌물을 돌려달라는 소송이 상당수 실려 있어 일제하 법질서가 극도로 혼탁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적출자가 없으면 서자나 여자의 유산상속, 부모의 자식 부양의무 등 법률적 미비로 명확한 규정이 없었던 사안들에 대해 `조선의 관습'을 주요 판단근거로 제시하는 등 일제 초기에 관습법을 판례화시킨 사례도 눈에 띄게 많았다.

법원도서관은 앞으로 매년 2∼3권씩 판결록 번역작업을 벌여 향후 10∼15년내에 전권을 완역할 계획이다.

법원도서관은 2000년부터 2002년까지 선고된 대법원 사건 중 인권, 국제거래, 경제행위 등에 관한 판례 100건을 번역한 영문판례집도 발간했다.

일제 판례집이 어두운 과거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라면 영문판례집은 세계화 추세로 외국과 교역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한국 법원의 발전상과 법률문화를 해외에 적극 알리겠다는 취지에서 발간한 것이어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법원도서관은 2003년 판례 중에서도 영문으로 번역할 사건 35건을 선정했으며 2년마다 1권씩을 목표로 영문판례집 발간작업을 계속 이어갈 계획이다.

법원도서관은 지금까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중국, 대만 등 해외 22개 대학과 법원, 정부기관에 국문판례집을 제공해 왔으나 앞으로 영문판례집 발간이 늘어나면서 해외 기관과 판례집 교환이 더욱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일제 `고등법원판결록'에 어떤 내용 담겼나
독립군 중형.성매매 허용.관습법 인정 등 수록

(서울= 고웅석.류지복 기자) 법원도서관이 소장해온 일제 `고등법원판결록'을 현대 어법으로 번역한 국역본 제 1권에는 1909년부터 1912년까지의 판결문이 시대순으로 정리돼 있어 그 시대상을 엿보는 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판결록 1권은 일제 초기의 법원이 김좌진 장군이나 의병부대원의 활동을 형법상 강도나 강도살인죄로 재단해 처벌한 사실 등을 소상히 보여주는 한편 사회상을 근대법의 시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기회도 함께 제공해주고 있다.

▲"김좌진 장군의 군자금 모금활동을 `강도'로 의율" = 일제 치안당국은 김좌진 장군의 독립자금 모금활동을 강도범죄로 몰아 실형을 선고했다는 김좌진 기념사업회의 주장이 이번 판결록 발간을 통해 사실로 확인됐다.

서울의 육군무관학교 졸업후 애국계몽운동에 나섰던 김 장군은 21살때인 1911년 북간도 독립군 사관학교 설립에 필요한 군자금 조달을 위해 족질((族姪)인 김종근씨를 찾아갔다가 경찰에 잡혀 징역 2년6월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 투옥된 사건이 `고등법원 판결록'에 `강도의 건'으로 묘사돼 있는 것이다.

이 사건의 판결록 내용은 상고심 판결문이기 때문에 사실관계가 자세히 나타나있지는 않으나 일제 고등법원은 2심인 경성공소원(항소법원)의 판결을 인용, "피고인 김좌진은 안승구 등과 함께 김종근 집으로 돌입해 재물을 강취할 것을 공모하고, 김좌진은 다른 자를 인도해 김종근의 저택 부근에 이르렀는데 그 집 안에 다수인이 모여있는 모습을 보고 착수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떠났다"고 언급했다.

이어 고등법원은 김좌진 장군측의 반론에도 불구, 구한말에 제정된 `형법대전'의 강도 죄를 적용해 상고를 기각하고 2년6월의 형을 확정지었다.

▲"의병부대원 강도살인 죄 적용해 교수형" = 일제의 대한제국 병탄(倂呑)을 전후한 시기에 강원도 지역에서 활동한 강두필 의병대장의 부하로 보이는 김두수는 헌병보조원 2명을 사살했다는 혐의로 기소돼 2심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판결록에 따르면 고등법원이 김두수가 `수괴'(강두필 의병대장)의 조의(造意)에 의해 부하를 지휘해 김모, 장모 등 헌병보조원 2명을 발포 공격해 살해했다는 경성공소원의 판결을 그대로 인정하고, 여기에 강도죄까지 적용해 교수형을 확정했다.

▲"조선의 관습이다"= 법원도서관이 내놓은 민사판결록 중에는 조선의 관습을 판단 근거로 삼은 판례가 현저히 많은 것이 특징이다.

판결록에 실린 125건의 판례중 30여건을 제외하면 모두 대한제국의 특수한 법규나 관습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같은 판례는 주로 채권이나 이자 등 계약관계, 혼인ㆍ친자ㆍ유산 등 가족ㆍ상속관계, 소송절차 등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어 사회에서 통용되는 관습이 일제 초기에는 질서유지의 중요한 수단이었음을 보여줬다.

관습을 판례화시킨 사례 가운데 눈에 띄는 대목은 자식부양 의무주체에 관한 판결문이다.

자식을 부양할 의무를 지닌 자는 모(母)가 아닌 부(父)라고 판단, 첩이 따로 살면서 사생아를 부양하는데 든 비용은 부가 나중에라도 부담해야 한다며 첩에게 금전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내려진 것이다.

조선 세조가 절에 하사한 논밭을 절에 소속된 모든 승려의 결의를 받아 매수했으나 고등법원이 "황실에서 사찰에 하사한 부동산은 절대 처분할 수 없다는 것이 조선의 관습이다"고 인정하는 바람에 매수 자체가 무효화된 사례도 눈길을 끈다.

본처에게 자식이 없으면 서자가 유산을 상속한다, 여자는 유산상속인이 될 순 있지만 집안의 대를 이을 가독(家督)상속인은 될 수 없다, 상속후 호주가 되면 선대의 채무를 무한으로 승계해야 한다는 판단도 조선의 관습을 인용한 이색 사례다.

▲"돈 줄테니 재혼하지 말라"= 1894년 갑오경장 당시 개혁법령중 하나는 조선 세종 때부터 금지된 과부의 재가를 자유의사에 맡긴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수절을 중시해온 사대부 입장에서 과부의 재혼은 수치스런 일이어서 재물로 이를 막으려던 일이 왕왕 존재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1911년 송모씨가 신모(여)씨를 상대로 낸 소송이 이를 반증한다. 신씨는 재혼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시댁으로부터 논밭과 가옥, 소 등을 받았지만 나중에 약조를 어겨 재물 반환 청구소송을 당했다.

신씨는 갑오경장 이후 과부의 재가가 허용됐다는 점을 고려할 때 평생 재혼을 하지 않겠다는 조건의 계약은 사회질서 및 선량한 풍속에 반하는 불법행위이므로 무효라고 항변했으나 결국 패소했다.

고등법원은 "과부재가 허용의 의미는 재혼금지를 해제한 것이지, 부녀자의 재혼을 강요한 것은 아니다. 재혼을 안하는 조건으로 법률행위를 하더라도 자유의사에 따른 것이라면 사회질서에 반하지 않는다"면서 받은 재산을 돌려주라고 판결했다.

▲"사대부는 직접 상거래를 꺼렸다"= 조선시대 양반은 부동산 거래시 패지(牌旨)를 이용했다. 패지는 사대부들이 자기 명의로 부동산을 파는 것을 꺼려 종이 매수인을 찾아보게 하려고 작성한 문서로 패지를 받은 종은 직접 또는 거간(居間)을 통해 매수인을 찾았다.

이 패지의 법률적 성격을 둘러싸고 분쟁이 빚어졌다. 유모씨는 양반가 백모씨의 종이 갖고 있던 패지를 보고 땅을 사겠다면서 패지까지 받았지만 갑자기 백씨가 땅을 팔겠다는 의사를 철회해 버리자 결국 법정다툼이 벌어졌다.

고등법원은 "패지는 종에게 매수인을 수색하라는 명령인 동시에 매매의 유인장에 불과하므로 매매 대리권까지 부여됐다고 볼 순 없다"며 "매매계약의 성립은 패지를 건네받은 시점이 아니라 폐지발행자의 매각 승낙이 이뤄진 시점"이라며 백씨의 손을 들어줬다.

상거래에 직접 나서길 꺼리고 이문을 따지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하던 조선시대 사대부의 복잡한 거래관행이 빚은 해프닝인 것이다.

▲"창녀 고용위한 매매계약은 유효"= 고등법원이 1911년 두 일본인간 벌어진 대여금 청구소송에서 내린 판결을 보면 당시 성매매 여성이 일정한 단속 하에 그 존재를 인정받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인 A씨는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이 고용하고 있던 창녀를 일본인 B씨에게 매도했는데 어떤 연유인지 불분명하지만 나중에 B씨가 A씨를 상대로 이 대금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A씨는 이 계약이 선량한 풍속과 사회질서에 반해 법률상 보호받을 수 없는 무효행위라고 주장했지만 고등법원은 "창녀라는 자는 행정법상의 일정한 단속하에 존재가 인정되므로 이들의 고용자금에 제공하기 위해 행한 금전대차 계약은 사회질나 선량한 풍속에 반하는 무효라고 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성매매특별법이 제정돼 성매매 알선이나 성매매자 고용, 모집 과정에서 발생한 채권ㆍ채무관계는 불법원인급여로서 원천무효화하고 있는 오늘날의 법현실과 사뭇 다른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