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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의 진실과화해위원회 과거사 청산 대상 본문

제주 4.3

남아공의 진실과화해위원회 과거사 청산 대상

달고양이 Friday 2023. 5. 3. 00:46

TRC 보고서의 과거사 청산 대상

과거 남아프리카공화국( 이하 '남아공')은 인종분리정책을 고집하는 백인 우월주의 국가로 인식되었습니다. 하지만 민주화 이행기를 거친 후 남아공은 과거 청산의 모범 국가로 소개되면서 우리의 과거 청산의 모델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남아공의 인종분리정책은 식민지 시대 백인이 흑인을 노동자로 착취하기 위해 탄광 지역으로 집단 거주시킨 데서 출발했습니다. 1948년 이후 인종간 거주지역을 엄격하게 구분하기 위한 각종 법률이 제정되기 시작해, 수많은 인종분리 법률이 “흑인들을 요람에서 무덤까지 통제하고 불이익을 주기 위해 제정되었습니다”(Jay A. Vora & Erica Vora 2004, 304). 공간적 분리에서 점차 사회, 경제적 차별과 착취로 확대 고착되었습니다. 이후 흑인에 대한 인권침해 사례가 빈번히 발생했으며, 심지어 흑인 말살을 위한 정책까지 집행되기도 했습니다.

(좌)아파르트헤이트 당시 백인 전용 시설임을 알리는 간판. (우)아파르트헤이트 반대 포스터

남아공에서 과거 청산은 인종주의, 폭력 그리고 이데올로기 남용에 의존하여 지배하던 앙시앙 레짐이 몰락하면서 민주주의 체제 이행기 과정에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안정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새로운 민주주의 체제로 이행하기 위해 과거 청산은 중요했으며, 실질적인 민주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도 과거 청산을 통한 새로운 체제를 구축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정권 교체 다음 해인 1995년 ‘국민통합 및 화해 증진법(The Promotion of National Unity and Reconciliation Act)’이 제정되고 그 결과 '진실과 화해위원회'가 설치되면서 청산 작업이 구체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투투 위원장의 리더십 하에서 진실과 화해 위원회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청문회를 개최하는 등 국민적 고통을 수반하는 조사 작업에 착수하여, 총 7권의 보고서를 만델라 대통령에게 제출하게 되었습니다.

넬슨 만델라, 1918-2013

TRC는 인종분리정책(아파르트헤이트)을 체제적 수준의 인도에 반하는 범죄로 규정했다. 이와 동시에 TRC는 인도에 반하는 범죄로 인종분리정책과 특정한 행위라는 미시적 차원의 범죄로 구분합니다. 이를 통해 갈등과 분쟁의 당사자들의 인권 침해 행위 여부를 정의로운 전쟁 이론에 토대를 둔 기준에 따라 동일하게 적용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즉 다수였지만 피지배자였던 흑인에 의한 인권침해도 다루고 있습니다.

TRC 보고서 1권은 인권침해 조사를 위한 원칙과 방법론 등을 다루고 있다. 보고서는 화해를 ‘목표이면서 하나의 과정’으로 인식하면서 다양한 수준의 화해가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화해는 목표이면서 하나의 과정이다.

TRC Report Vol. One

보고서는 진실을 화해 첫 걸음으로 인식하며, 진실을 4가지 차원(사실적 진실, 개인적·담화적 진실, 사회적 진실, 치료·회복적 진실)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실적 진실은 사회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획득 될 수 있는 진실이다. 보고서는 사실적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서 개인적 수준의 인권침해 사실, 인권침해의 맥락, 원인, 그리고 패턴을 파악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TRC Report Volume One, 111).

사실적 진실, 개인적/담화적 진실, 사회적 진실, 치료/회복적 진실

개인적·담화적 진실은 청문회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보고서는 이 과정을 통해 개인들이 과거를 발견하게 되며, 미래에 대한 시각을 정하게 된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진실은 군, NGO, 정당들이 공개 토론을 통해 사회적 담론으로 확대되면서 인간의 존엄성과 통합성을 확인하는 토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위원회는 치료·회복적 진실을 가장 핵심적인 진실로 규정하고, '인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TRC Report Volume One, 114). 진실에 대해 흔히 알고 있는 바와 달리 TRC 보고서는 다층적 측면의 진실을 규정하고, 이를 화해, 더 나아가 통합을 위한 방편으로 삼았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TRC 활동은 통합과 화해 증진을 위해 민주적이고 투명하고, 참여적 과정과 광범위한 공론을 통해 공개 토론과 민주적 문화를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과거의 폭력 행위들의 전체적인 양상을 인식할 수 있도록 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TRC는 피해자들의 존엄성 회복, 미래의 폭력을 예방하기 위한 권고를 통해 신뢰를 회복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TRC 보고서 2권은 분쟁이 확대되고 광범위한 인권침해가 발생하게 된 맥락을 검토하고, 주요 행위자들에 의해 자행된 인권침해의 특징과 범위를 규명하고 있습니다. TRC는 남아공의 분쟁이 발생하게 된 사회, 정치적 배경으로 인종차별주의, 탈식민화, 냉전을 거론하면서 이후 분쟁의 양상을 띠게 되는 무장봉기와 진압전략이 펼쳐진 과정을 규명하고 있습니다.

TRC 보고서 3권은 남아공의 지역별 폭력 양태를 보고하고 있습니다. 이 보고서는 지역별 특징과 가해자 집단의 폭력 양태와 인권 피해의 연관성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특이할만한 점은 TRC에 적대적인 지역 공동체(백인 공동체)에서도 청문회가 진행되어 보고서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TRC 보고서 4권은 인종분리정책과 사회 각 분야의 관계를 규명하고 있다는데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TRC는 청문회를 통해 밝혀진 내용을 토대로 경제분야, 종교분야, 사법 분야, 보건 분야, 언론, 군, 아동․청소년 분야, 여성분야에서의 인종분리정책의 의미와 실제를 규명하고 있습니다.

TRC는 청문회를 통해 인종분리정책이 남아공 사회에 미치는 복잡한 권력관계를 조사하여, 흑인의 일자리 문제, 흑인 인구 유입 통제, 임금 불평등의 문제, 자원의 불평등한 접근의 문제, 노동조합 권리 투쟁의 역사 등 경제분야를 광범위하게 규명하고 있습니다. TRC가 기업부문을 조사한 이유는 인종분리정책 시대에 기업의 역할에 대한 규명을 통해 기업이 새로운 변화를 추동하지 못한 이유를 탐색하기 위해서였습니다.

TRC는 법치주의를 인종분리 정책이 장기간 지속된 요인으로 지목하고 있습니다. 국민당의 부정의한 통치를 위해 ‘법에 의한 지배’ 논리가 인종분리정책을 장기간 정당화시켰다는 점을 규명하고 있습니다.

의료 분야에서 감옥에 수감된 피해자들에게 의료인들, 의료기관들이 적절한 치료를 제공하지 않거나 잘못 조치한 경우 등 의료인들의 윤리도 문제 삼고 있습니다. 또한 남아공의 의료 서비스의 불평등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심지어 의료 정보나 의료기술을 고문 수단으로 악용하는 사례도 있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TRC 보고서 5권은 구체적인 인권침해 사례를 설명하면서 인권침해의 원인, 동기, 그리고 인권침해 행위에 대한 관점 등을 규명하고 있습니다. TRC가 밝히는 국가에 의한 인권침해 행위 원인으로 보안군 등 가해자들의 폭력행위에 대한 규율, 규제의 부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TRC Report Vol Five, 269-270). 가해자들의 행위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는 화해의 문제와 관련해서 남아공 진실과 화해 위원회에 중요했다(TRC Report Vol Five, 271). 그들의 행위를 비난할 수도 있고, 공감을 표명할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듯이 가해자들을 국가 체제의 하나로 이해하고 그들의 폭력행위는 국가권력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는 관점에서 가해자들이 희생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입장은 피해자들의 고통을 잊고 가해자들의 행위를 무시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었습니다. 가해자들에게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면책(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문제가 있었습니다(TRC Report Volume Five, 274).

이런 위험성을 정면으로 대면하면서 보고서는 정치적 동기(맥락)로 냉전, 인종분리정책 체제, 인종차별주의를 제시하면서도 가해자들의 폭력을 전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며, 사회적 정체성을 폭력 행위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TRC Report Vol Five, 287-291). 또한 폭력이 발생하게 된 상황적 조건으로 명령에 대한 복종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보고서는 복종을 권위화, 일상화, 그리고 탈인간화가 체계적으로 작동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범죄 행위로 간주되고 있습니다.언어는 권력으로서 이데올로기의 핵심

언어는 권력으로서 이데올로기의 핵심

TRC Report Vol. Five

특히 TRC는 폭력의 최소 역할을 한 언어를 권력의 의미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언어는 권력으로서 이데올로기의 핵심”(TRC Report Vol Five, 296)이며, 인종분리 체제의 다층적 담론이 상호 영향을 받으며 폭력 유발 가능성의 조건을 만들어 놓았다고 규명하고 있다.

아파르트헤이트 담론은 사회화된 범주를 구축하고 법률의 언어에 새겨져 있었다. 이로 인해 집단간의 차이와 거리가 만들어졌다. 분쟁의 악순환이 가속화되어, the ANC와 PAC가 1960년대 무장투쟁 상태로 돌입하게 되었을 때, 아파르트헤이트 치안 장치들의 언어가 확산되었다. 1970년대 말 이해, ‘총공격과 총전략’의 언어로 사람들이 점차 군사주의, 편들기, 그리고 ‘적’의 구축 담론으로 휩싸이게 되었다. 해방운동의 측면에서 보면, 비슷하게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는 ‘적’으로 구축되었다. 담론의 악순환이 점차 ‘타자’를 탈인간화시키며, 폭력의 조건을 만들고 있었다.

남아공의 진실과화해위원회의 보고서는 단순히 인권침해를 규명하고 사면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보고서의 의미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권력 불균형, 인종분리정책에 따른 비극을 발생시킨 역사적, 정치적 환경, 구성원이 복종함으로써 도덕적 자제력을 마비시키도록 하는 집단의 영향, 집단적 규범의 내면화, 그리고 타인을 비인간화하는 것을 허용해 주는 언어들의 이데올로기 등을 청산의 대상으로 규명한 것입니다.

남아공의 진실과화해위원회의 활동 역시 미흡한 측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 유사하게 분쟁을 경험했던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로 이런 경로를 밟았지만, 남아공 만큼의 성과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주4.3 역시 마찬자지라고 생각합니다.

제주4.3 진상조사보고서가 말하는 진실은 과연 무엇이며, 무엇이 더 필요한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그리고 치료/회복적 진실을 위해 원인을 반듯이 규명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은 남아공이 뚜벅뚜벅 걸어가는 실질적 민주화의 길을 우리도 걸어가야 합니다.

참고자료

Jay A. Vora and Erika Vora, “The Effectiveness of South Africa's 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Perceptions of Xhosa, Afrikaner, and English South Africans”, Journal of Black Studies Vol. 34, No. 3 (Jan., 2004), pp.301-322.

TRC Report Volume One ~ Volume Five.